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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도서

스코틀랜드 분리 독립운동의 역사적 기원

Historical origins of the Scottish independence movement

저자
홍성표
발행사항
청주 : 충북대학교 출판부, 2010
형태사항
359 p. : 삽화, 지도, 초상 ; 23 cm
서지주기
참고문헌(p. 336-350), "중세 스코틀랜드의 연대기" 및 색인수록
소장정보
위치등록번호청구기호 / 출력상태반납예정일
이용 가능 (1)
연구외도서G100082대출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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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번호
    G100082
    상태/반납예정일
    대출가능
    -
    위치/청구기호(출력)
    연구외도서
책 소개
도서 주요내용 및 학문적 기여도

2007년에 실시된 스코틀랜드 의회 구성을 위한 총선거에서 스코틀랜드 국민당(Scottish National Party)이 전체 의석 129석 중에서 47석을 얻어 46석을 얻은 노동당에 한 석 차이로 승리하여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런데 이 선거에서 스코틀랜드 국민당이 내세운 중요한 선거 공약 중의 하나가 대브리튼 연합왕국으로부터 스코틀랜드의 분리 독립 여부를 결정할 주민 투표를 2010년 11월에 실시하겠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스코틀랜드 국민당 당수인 알렉스 샐먼드(Alex Salmond)가 여러 차례 공언한 것처럼 스코틀랜드의 미래를 스코틀랜드 주민들이 결정하여야 한다는 주민투표가 2010년 11월에 예정되어 있다.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북해 유전을 바탕으로 스코틀랜드가 경제적 자립이 가능하고, 또한 민족이나 문화 및 언어가 다른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로부터 분리 독립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무엇보다도 국가 성립과 발전의 역사적인 배경이 다른 두 왕국이 분리 독립하는 것은 스코틀랜드 역사를 되찾는 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정치적으로 볼 때도 1707년 앤 여왕 때 이루어진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정치적 통합은 강자에 의한 약자의 흡수 통합이라는 관점에서 통합 이전 상태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금년 11월에 실시될 주민 투표에서 스코틀랜드의 분리 독립 문제가 어떻게 결정될 것인가 하는 점은 대브리튼 연합왕국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관심사임에 틀림없다.

필자는 본 저서에서 스코틀랜드에서 일어나고 있는 대브리튼 연합왕국으로부터의 분리 독립운동에 대한 역사적 기원을 추적하여 보려고 노력하였다. 1707년 앤 여왕 통치기에 통합 의회 구성에 의한 정치적 통합이 이루어진 이후부터 분리 독립운동이 일어났는가? 아니면 그 이전부터 있어온 잉글랜드의 스코틀랜드 지배 정책에 대한 스코틀랜드 인들의 저항 속에서 분리 독립운동의 정신을 추구할 수 있는가? 이러한 문제의식 하에서 본 저서를 집필하였다.

스코틀랜드 왕국의 알렉산더 3세(1249-1286)가 자신을 이을 직계남성 상속자 없이 사망한 1286년부터 스코틀랜드의 정치적 불행은 시작되었다. 왜냐하면 그가 과거부터 내려온 스코틀랜드의 왕위계승 원칙, 즉 남성우선주의와 직계우선주의 원칙에 적합한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스코틀랜드 왕국의 대귀족들은 알렉산더 3세의 외손녀인 노르웨이 처녀 마가렛(1286-1290)이 알렉산더 3세의 최근친으로서 그녀의 왕위 계승과 함께 그녀가 성년이 될 때까지 왕국의 보호자(Guardian)들이 통치하기로 결정하였다. 여섯 살에 불과한 어린 여왕이 즉위하여 난국에 처한 스코틀랜드 왕국의 대귀족들은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인 에드워드 1세(1272-1307)가 스코틀랜드를 보호하여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에드워드 1세는 자신을 스코틀랜드 왕국의 상왕으로서 인정하여야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조건을 제시하였다. 이미 이때부터 그가 잉글랜드의 스코틀랜드 지배를 실현시키려는 시도를 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는 바로 솔즈버리 조약과 버갬 조약을 체결하여 스코틀랜드를 지배하기 위한 또 다른 계획에 착수하였다. 노르웨이 처녀 마가렛의 스코틀랜드 왕국의 왕위 계승 절차를 논의하기 위해 스코틀랜드와 노르웨이, 그리고 잉글랜드가 협의한 솔즈버리 조약을 에드워드 1세가 주도하여 잉글랜드에게 유리하게 체결하였고, 에드워드 1세는 그의 아들인 에드워드와 노르웨이 처녀 마가렛을 결혼시키려는 버갬 조약을 체결하여 그의 스코틀랜드 지배를 위한 본격적인 발판을 마련하였다. 비록 두 사람을 결혼시키더라도,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와 분리 독립하여 존재한다는 점을 버갬 조약에서 에드워드 1세가 인정하였으나, 그것은 위장된 전술에 불과하였다. 왜냐하면 버갬 조약을 논의하는 과정에서도 에드워드 1세는 그의 최측근인 안토니 백(Anthony Bek)을 비롯한 잉글랜드의 고위성직자와 대귀족들을 스코틀랜드 왕국의 섭정자로 받아들이도록 압력을 가하는 등 스코틀랜드 지배를 위한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기 때문이다. 결국 스코틀랜드 대귀족들이 왕국의 안정을 위해 에드워드 1세가 내세운 조건을 수용하였다. 그러나 마가렛이 요절함으로써 에드워드 1세의 결혼을 통한 스코틀랜드 지배 야욕을 일시 접어야 했다. 이제 누가 마가렛의 뒤를 이어 스코틀랜드 왕국의 통치자가 되어야 하는가를 결정할 대소송(Great Cause)이 시작되었다.

스코틀랜드 왕위계승권을 주장하는 13명의 후보자 중에서 누가 적법한 권리를 소유하였는가를 결정하기 위한 대소송의 진행을 에드워드 1세가 주도하도록 스코틀랜드 대귀족들이 위탁함으로써 결국 그가 스코틀랜드 왕위계승권자를 가리는 최고재판관이 되었다. 비록 104명의 심판관들이 선발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가 대소송을 어떻게 이끌어 갈 것이며, 최종적으로 누구를 스코틀랜드의 국왕으로 선택할 것인가 하는 권한을 소유하였다. 이제 에드워드 1세가 또 다시 스코틀랜드 지배권을 확보할 기회를 잡은 것이다. 그는 우선 13명의 왕위계승권자들에게 누가 스코틀랜드의 왕위를 계승하던 간에 그를 스코틀랜드 국왕의 상왕으로 인정할 것을 요구하였고, 이러한 에드워드 1세의 조건을 모두가 수용하였다. 그러므로 대소송의 결과 왕위에 오른 존 발리올(John Balliol), 즉 존 1세는 에드워드 1세를 상왕으로 인정한 가운데 왕위에 오른 것이다. 만약 존 1세가 이러한 조건의 변화를 시도한다면, 결국 양자 사이에 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이 맥더프(Macduff) 소송사건을 계기로 현실화되었다. 즉 맥더프 소송사건을 계기로 존 1세가 에드워드 1세의 상왕권을 부정함으로써 에드워드 1세가 봉신 왕(vassal king)의 지위를 부정한 존 1세를 굴복시키기 위하여 1296년 던바 전투를 일으켰다. 이 전쟁에서 존 1세가 패배함으로써 스코틀랜드가 완전히 잉글랜드에 종속되었다. 에드워드 1세가 파견한 잉글랜드인 관리들이 스코틀랜드를 통치하였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투쟁이 필요하였으며, 이는 독립전쟁의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

이때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1세에 대항하여 스코틀랜드의 자유와 자치를 위한 독립전쟁을 이끈 대표적 인물이 윌리엄 월레스(William Wallace)와 로버트 브루스(Robert Bruce) 7세이다. 그런데 윌리엄 월레스는 평민으로서 스털링 브릿지(Sterling Bridge) 전투를 승리로 이끌면서 초기 독립전쟁을 주도하였다. 특히 그는 에드워드 1세에 의해 폐위된 존 1세의 복위를 주장하면서 독립전쟁을 이끌었다. 한편 로버트 브루스 7세는 대소송에서 얻는데 실패한 스코틀랜드 왕위계승권을 얻고자 하는 열망을 갖고 에드워드 1세에 대항한 독립전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므로 스코틀랜드 왕국의 자유와 자치를 위해 잉글랜드 왕국에 대항하여 투쟁하였다는 점에서는 윌리엄 월레스와 로버트 브루스 의 행적에는 공통점이 있으나, 그들의 목적은 서로 달랐다. 왜냐하면 존 1세의 복위를 통해 스코틀랜드 왕국의 자유와 자치를 추구한 윌리엄 월레스와는 달리 로버트 브루스 7세는 에드워드 1세가 주도한 대소송에서 자신의 왕위계승권을 상실하였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윌리엄 월레스가 폴커크(Falkirk) 전투에서 잉글랜드 군에게 패배한 후 정치적 실권을 상실하고, 뒤이어 체포되어 처형된 후, 스코틀랜드의 독립전쟁을 로버트 브루스 일파가 이끌어갔다. 그는 1314년에 일어난 배넉번(Bannockburn) 전투에서 잉글랜드 군을 대파하면서 스코틀랜드의 자유와 자치를 위한 기반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1320년에 교황에게 보낸 편지인 아부로스 선언(Declaration of Arbroath)에서 다시 한 번 스코틀랜드의 자유와 자치에 대한 이상을 대외적으로 표명하였다. 한편 1306년 스스로 로버트 1세(1306-1329)로서 스코틀랜드 왕국의 왕위에 오른 로버트 브루스 7세는 자신과 적대관계를 유지하고 친잉글랜드적인 태도를 견지한 대귀족들을 차례로 힘으로 제압하면서 과거 알렉산더 3세 시대에 스코틀랜드가 누렸던 정치적 자유와 자치를 회복하여 나갔다. 이제 국왕을 정점으로 국민적 결속이 이루어진 스코틀랜드 왕국을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왕들이 더 이상 힘을 바탕으로 지배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1328년 양 왕국 사이에 에딘버러/노샘프턴 평화조약이 체결되어 잉글랜드 왕이 소유하였던 스코틀랜드 왕국에 대한 상왕권을 포기하고 스코틀랜드를 독립왕국으로 인정함으로써 스코틀랜드 인들의 오랜 독립전쟁이 결실을 맺게 되었다. 물론 그 이후 데이비드 2세(13029-1371) 통치 시기에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자주 전쟁을 벌였으나, 그것은 스코틀랜드 왕국의 독립전쟁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프랑스와 스코틀랜드가 맺은 공수동맹 때문에 일어난 전쟁이었다. 그런데 스코틀랜드 왕국은 잉글랜드를 견제한 교황들과 프랑스의 도움으로 전쟁의 고비마다 발생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필자는 스코틀랜드 왕국이 에드워드 왕들에게 종속되는 과정과 이를 벗어나고자 한 스코틀랜드 인들의 독립전쟁의 목표와 독립전쟁의 전개 과정에 초점을 맞추어 본 저서를 저술하였으나, 이에 그치지 않고 엘리자베스 1세가 사망하여 튜더 왕조(1485-1603)가 단절된 후,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두 왕국의 왕실이 하나로 통합되어 성립한 스튜어트 왕조(1603-1688)의 성립과정, 그리고 1707년 앤 여왕의 통치기에 통합법(Union Act)에 의한 대브리튼 연합왕국의 성립과정에 대하여서도 검토하였다. 왜냐하면 오늘날 스코틀랜드에서 일어나고 있는 분리 독립운동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세 스코틀랜드 왕국을 지배하려는 잉글랜드 에드워드 왕들의 야망과 결부된 역사적 변화뿐만 아니라 스튜어트 왕조의 성립은 물론 통합법에 의한 대브리튼 연합왕국의 성립과정에 대한 이해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오늘날 스코틀랜드 국민당이 주도하고 있는 분리 독립운동의 정신은 중세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스코틀랜드의 역사적 변화 속에 담겨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금년 11월 실시 예정인 주민투표의 성공 여부에 대한 예측과 판단이 오늘날 스코틀랜드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인 요소에 대한 검토 못지않게 중세 이후 전개된 스코틀랜드의 분리 독립운동사에 대한 검토를 전제하고 있다.

필자는 이러한 전체 연구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점에 주목하면서 기존의 연구서들, 특히 스코틀랜드 학자들의 연구에 대한 비판과 함께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려고 노력하였다. 첫째, 스코틀랜드 왕국이 잉글랜드 왕국에 종속된 시기 문제이다. 일반적으로 중세 스코틀랜드사 연구자들은 스코틀랜드 왕국의 존 1세가 던바 전투에서 패배한 후 포로로 잡혀 런던으로 이송되고, 에드워드 1세의 관리들이 스코틀랜드 중앙 정부의 통치권을 장악한 시기부터를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에 종속된 시점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 사건 이후 스코틀랜드 인들은 왕국의 자유와 자치를 위해 투쟁하였으며, 그래서 그 투쟁은 독립전쟁으로의 성격을 지닌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필자는 이와 생각을 달리한다. 왜냐하면 노르웨이 처녀 마가렛의 뒤를 이을 왕위계승권자 결정을 위한 대소송을 주도한 에드워드 1세가 13명의 왕위계승권 주장자들에게 상왕권을 요구하였고, 13명 모두가 이를 수용한 시점부터 이미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에 종속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스코틀랜드의 어린 여왕 마가렛과 에드워드 1세의 아들 에드워드를 결혼시켜 실질적인 스코틀랜드에 대한 통치권을 장악하려는 에드워드 1세의 의도가 마가렛이 사망하여 실패하자, 이번에는 대소송을 통해 그러한 의도를 성취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대소송을 단순히 마가렛의 뒤를 이을 왕위계승권자를 결정하기 위한 심리로 볼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스코틀랜드의 대귀족들이 에드워드 1세에게 문제 해결을 위탁한 실책을 그가 적절하게 이용하여 스코틀랜드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한 계기로 이해하는 것이 올바른 파악일 수 있다. 둘째, 던바 전투 이후 1328년 에딘버러/노샘프턴 평화조약 체결까지의 독립전쟁의 성격 문제이다. 대소송 과정에서 에드워드 1세가 범한 불법성이 대소송 자체의 법적 효력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 대소송의 전체 과정은 형식상 합법성을 지니고 있다. 적법한 왕위계승권자 결정을 위한 법적 검토, 심판자들의 의견 존중, 상속권 주장자들의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한 법적 근거 제시 등이 바로 대소송의 합법성을 대변한다. 그러나 이러한 절차와 견해가 자발적인 동의가 전제되어야 대소송의 결과가 합법성을 지닌다. 그러나 에드워드 1세는 대소송이 열리는 노햄 성 주변에 군대를 동원하여 위협함은 물론 왕위계승권 주장자들에게 강압적으로 상왕권을 인정하게 한 가운데 대소송을 진행시켰다. 이러한 강제성을 전제한 대소송은 원초적으로 법적 효력이 없음을 지적하여야 한다. 오늘날 국제법상 힘을 바탕으로 체결된 국제 조약이 무효인 것처럼 강제성과 무력이 개입된 맹세와 동의는 법적 효력이 없다. 그러므로 1296년 던바 전투 이후 1328년 에딘버러/노샘프턴 평화조약 체결로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의 상왕권으로부터 벗어날 때까지 스코틀랜드의 독립전쟁은 바로 대소송의 무효화를 위한 투쟁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아부로스 선언에서 대소송이 지닌 불법성을 지적하지 않은 것은 스코틀랜드의 독립정신을 약화시킨 결과를 초래하였다고 주장할 수 있다. 셋째, 스코틀랜드 인들의 독립전쟁의 성격 문제이다. 전통적으로 스코틀랜드사 연구자들은 아부로스 선언을 스코틀랜드 인들의 민족주의 사상을 표명한 독립선언서로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아부로스 선언에서 스코틀랜드 인들이 표명한 것은 민족주의가 아닌 국민적 정체성(national identity)이며, 이에 더하여 스코틀랜드 인들의 개인주의 정신을 천명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중세 스코틀랜드 인들은 대귀족에게 종속된 제후국 중심으로 정치와 경제 활동이 이루어졌다. 그만큼 왕권이 왕국 전체를 지배할 정도로 강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잉글랜드와의 투쟁 속에서 스코틀랜드 인들에게는 같은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다는 소속감이나 일체감이 생겨났고, 특히 로버트 브루스 7세가 국왕이 된 후 대귀족들을 자신의 힘 아래 복속시키면서 하나의 통일된 왕국을 형성해나갔다. 그만큼 잉글랜드에 대항한 스코틀랜드의 힘이 강화되었다. 바로 그 원동력을 필자는 국민적 정체성의 형성과 확대에서 찾았다. 그리고 그 정신은 개인주의 정신을 바탕으로 한 자유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다. 아부로스 선언에서 주장한 자유와 자치에 대한 스코틀랜드 인들의 정신은 잉글랜드의 희생을 전제한 자유와 자치가 아니라 양 왕국이 서로를 존중한 개인주의 정신을 바탕으로 한 자유와 자치인 것이다. 따라서 아부로스 선언의 기본 정신은 국민적 정체성과 개인주의에 있다고 하겠다. 넷째, 오늘날 스코틀랜드 국민당이 중심이 되어 추진하고 있는 분리 독립운동이 쉽게 결실을 맺지 못할 것으로 필자는 예견한다. 오늘날 스코틀랜드 국민당이 주도하고 있는 분리 독립운동은 단순히 스코틀랜드가 1707년 양 왕국의 통합 이전 상태로 되돌아가자는 운동이 아니라 중세 스코틀랜드가 누렸던 자유와 자치를 회복하자는데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필자는 중세 아부로스 선언에서 주장한 스코틀랜드 왕국의 자유와 자치를 오늘날 스코틀랜드의 분리 독립운동과 연계시켜 파악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1999년에 스코틀랜드가 독립의회를 구성함으로써 정치적인 자치는 현재 이루었으나, 경제, 국방, 외교 분야에서는 아직도 중앙 정부에 의존적이다. 만약 북해 유전의 석유 자본을 바탕으로 경제적 자립을 이룰 수만 있다면, 국방과 외교적 분야의 자치 문제는 어렵지 않게 해결될 수 있을 것으로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2009년에 발생한 세계적인 경제 위기가 대브리튼 연합왕국의 경제적 어려움을 불러왔고, 스코틀랜드도 이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이러한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완전 분리 독립하였을 때 과연 스코틀랜드가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가에 대한 스코틀랜드 인들의 판단이 금년 11월에 예정되어 있는 분리 독립을 위한 주민 투표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판단된다.

위와 같은 필자의 주장에 타당성이 있어서 수용될 수 있다면, 본 저서의 내용이 스코틀랜드의 독립운동사를 복원하는데 조그만 보탬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목차

1.머리말
2.알렉산더 3세 이전의 스코틀랜드
3.알렉산더 3세 시대의 스코틀랜드
4.노르웨이 처녀 마가렛
5.대소송과 에드워드 1세의 스코틀랜드 지배 음모
6.잉글랜드에 종속된 스코틀랜드
7.윌리엄 윌레스와 스코틀랜드 독립전쟁
8.로버트 브루스와 스코틀랜드 독립전쟁
9.배넉번 전투
10.아부로스 선언의 역사적 의미
11.교황과 스코틀랜드의 독립전쟁
12.프랑스와 스코틀랜드의 독립전쟁
13.에딘버러/노샘프턴 평화조약의 성격
14.데이비드 2세 시대의 스코틀랜드
15.맺는말-17세기 이후의 스코틀랜드

[부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