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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도서민중이 지식과 학문을 이끌었던 위대한 세기, 과학혁명을 가져온 새로운 지식의 탄생!16Seiki bunka kakumei 1, 2

16세기 문화혁명

발행사항
서울 : 동아시아, 2010
형태사항
938 p. : 삽도 ; 22 cm
소장정보
위치등록번호청구기호 / 출력상태반납예정일
이용 가능 (1)
연구외도서G100180대출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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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번호
    G100180
    상태/반납예정일
    대출가능
    -
    위치/청구기호(출력)
    연구외도서
책 소개
역사에서 16세기는 흔히 ‘이름 없는 세기’로 불린다.
천재들이 주도했던 15세기 르네상스와 17세기 과학혁명.
그사이에 계곡처럼 존재하는 16세기.
그 시대에는 과연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세계 문화사의 공백으로 여겨지는 16세기를
과학사적 의미에서 재평가한 역작.

아사히신문저술상, 마이니치출판상에 빛나는 저자의
『과학의 탄생』을 잇는 또 하나의 세계적 업적!

◆ 전설적인 운동권 투사에서 세계적 학자로
도쿄대학교에 가면 지금도 불타버린 ‘야스다 강당’의 폐허가 남아 있다. 격동했던 한 시대의 교훈을 그들은 그렇게 기억에 보존하고 있다. 이 책의 저자 야마모토 요시타카는 1960년대 말 일본의 가장 격렬했던 학생운동 시대의 도쿄대 전학공투회의(일명 전공투全共鬪) 의장으로 유명하다. 1968년 당시 ‘도쿄제국대학 해체’와 ‘자기부정’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야스다 강당을 점거하고 불태운 주인공이 바로 그였다. 하지만 격정의 시대가 끝나갈 무렵인 1969년 2월, 그는 《아사히저널》에 ‘자기부정에 자기부정을 거듭해, 평범하지만 자각한 인간이 되어 한 사람의 물리학도로서 생을 살아가고 싶다’는 수기를 싣는다. 일본 최초로 노벨상을 수상한 유카와 히데키 교수의 부름을 받고 교토대학교에서 소립자물리학 연구를 하면서 ‘차세대 노벨상 수상자’로 주목 받았던 그는 그렇게 대학을 떠났다. 그리고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대입학원인 ‘슨다이예비학교’에서 물리를 가르치며 재야에서 외로운 학문의 길을 걸었다.
“세계적 수준의 독창적 업적”이라 평가 받는 『과학의 탄생』(원제 : 『자력과 중력의 발견』은 그렇게 탄생했다. 저자 야마모토 요시타카는 원서를 읽기 위해 직접 라틴어와 프랑스어를 새로 배우고, 고서점을 훑으며 희귀한 문헌들을 수집,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방대한 분량의 자료를 독파하면서 20여 년의 노력 끝에 이 대작을 완성했다. 이는 결코 대학 강단에서는 이룰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책은 일본 과학 출판계에서 자그마치 10만 권 이상이 팔리는 베스트셀러로 등극하며 그해 마이니치출판상, 오사라기지로 상, 일본 과학기술진흥재단저술상 등 각종 상까지 휩쓸었다. 1949년 유카와 히데키가 일본인 최초로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이래로 지금까지 과학 분야에서 노벨상을 수상한 일본인이 모두 13명(물리학상 7, 화학상 5, 의학 1)이나 되는 배경에는 과학에 대한 이러한 일반인들의 높은 관심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근대 과학이 탄생한 배경을 인류 문명사의 장대한 역사를 통해 추적한『과학의 탄생』 이후 4년 만에 다시 펴낸 『16세기 문화혁명』은 여러모로 그 연장선상에 있다. 역사가들에게 홀대 받았던 16세기를 과학사적 의미에서 새롭게 조명한다는 의미에서도 그렇고, 천재들의 업적에 가려 빛을 받지 못했던 한낱 장인, 기술자에 불과한 이들의 업적에 고루 빛을 나누어 주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 조각난 역사를 하나로 잇는 세계적 업적.
세계 문화사의 공백으로 여겨지는 16세기를 과학사적 의미에서 재평가한 역작.
역사 교과서에서는 흔히 14~15세기를 르네상스, 17세기 과학혁명의 세기라 일컫는다. 16세기에는 이렇다 할 만한 이름이 붙여져 있지 않다. 1492년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 항로 개척 이후를 ‘대항해 시대’라고 하지만 지리학적 발견만을 염두에 둔 것이므로 16세기 전체를 아우르기에는 무언가 부족한 점이 있다. 『블랙 아테나』를 쓴 역사가 마틴 버널조차 ‘16세기는 이름이 없다’ 혹은 ‘눈에 띄는 것이 없다’고 말했을 정도다. 게다가 예술사·사상사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인문주의(고전 연구)에 치중한 르네상스와 비교할 때 후기 르네상스라고 이름 짓기에도 무언가 석연치 않은 면이 분명히 있다는 점에서 저자는 의문을 제기한다.
보카치오나 라파엘로가 활동한 14~15세기의 르네상스와, 갈릴레오나 뉴턴으로 대표되는 17세기 과학혁명 사이의 계곡처럼 보이는 16세기. 이 시기에는 그야말로 별처럼 빛나는 천재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17세기를 준비하는 지식 세계의 거대한 지각변동, 다시 말해 ‘16세기 문화혁명’이 진행되고 있었다. 한마디로 케플러, 갈릴레오, 뉴턴, 윌리엄 하비를 필두로 한 17세기 신과학의 천재들이 남긴 혁혁한 업적은 16세기 문화혁명이 밀어올린 지반 위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저자가 주장하는 것은 르네상스기와 17세기에는 지식을 독점한 소수 엘리트 계층에 헤게모니가 있었던 것과 달리 16세기에는 오히려 수공업 직인으로서 예술가나 기술자(직인, 외과의, 나아가 시장통의 산수교실 교사나 뱃사람들)에게 그 변혁의 헤게모니가 있었다는 점이다. 아니, 그들이 없었다면 17세기 과학혁명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역사의 가정까지 제시한다. 그들은 스스로 적극적으로 자신들이 소외당하던 학문 세계의 경계를 타 넘어 들어감으로써 그전까지 굳게 닫혀 있던 장벽을 와해시켰다. 또 속어(각각 그 나라의 민중들이 쓰던 언어. 영어, 독어, 프랑스어, 네덜란드어 등)로 책을 씀으로써 라틴어로 굳게 보호 받고 있던 대학 아카데미즘의 지적 독점에 바람구멍을 냈다. 이것은 종래의 스콜라 문화를 대신하는 새로운 지식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었다. 즉 그들은 자신이 익힌 기술의 비밀을 문서로 만들어 공개했고, 종전까지 천시되던 수작업과 기계적 기예의 가치를 분명히 밝혔다. 또한 여기에 그치지 않고 그 과정에서 봉착한 갖가지 문제에 대해 합리적 고찰을 했다. 이렇듯 당시 문서에 편중돼 있던 사변적 학문을 대체할 경험 중시의 과학의 중요성과 유효성을 명백히 해 나감으로써 17세기 과학혁명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소박한 경험주의’는 나름의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실험과 측정의 결과를 수학적으로 이론화된 ‘법칙’으로 확정하지 못한 것이다. 가설과 논증의 체계를 갖춘 하나의 이론으로 세우고자 하는 목적의식성을 지니지 못함으로써 16세기 직인들은 과학혁명으로 가는 길 바로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고 저자는 분명하게 선을 긋는다. 그럼으로써 17세기 지식 생산의 헤게모니는 다시 직인에서 상류계층의 과학자로 넘어가게 된다.

◆ 17세기 과학혁명의 토대를 일군, 진정한 역사의 주인공들을 새롭게 조명하다
그렇다고 해도 17세기 새로운 과학의 형성은 당시 아카데미즘 세계가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여겼던, 직인들의 수작업과 기계적 기예를 평가해 줌으로써 가능해진 것이었다. 과학사에서 적어도 17세기 신과학의 등장은 그 이전의 기술사, 직인들의 실천을 빼놓고는 언급할 수가 없다.
공방에서 교육 받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물론이고, 화가이자 수학자인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 상업수학을 기초로 복식부기를 널리 보급한 루카 파치올리, 유리 직인 출신의 도공으로서 지질학과 고생물학을 연구한 베르나르 팔리시, 탄도학에서부터 정역학에 이르기까지 연구를 거듭해 갈릴레오를 선도한 독학의 산수교사 타르탈리아, 수리(數理)기술자이면서 일하는 틈틈이 대수학의 기초를 닦아 비에트와 데카르트로 이르는 길을 닦은 라파엘 봄벨리, 지상에서 나타나는 자연현상의 정량적 측정을 시작한 윌리엄 길버트, 그리고 그의 등장을 준비했던 선원 출신의 직인 로버트 노먼과 자수성가형 선원 윌리엄 버로, 정밀한 분석화학의 기초를 닦은 야금·시금 기술자인 이탈리아의 비링구초와 보헤미아의 라자루스 에르커, 정확한 천체관측은 물론이고 측량술과 지도학에도 정통한 덕분에 천체관측용 기구를 지상의 정량적 관측에 활용할 수 있었던 남부 독일과 네덜란드의 수리기능인들 그리고 응용수리과학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깨달은 잉글랜드의 존 디와 디그스 부자…….
모두 우리에게는 낯선 이름들이다. 저자 야마모토 요시타카는 천재들에 가려 역사에서 제대로 평가 받지 못했던 수많은 기술자·장인들의 삶과 업적을 손에 잡힐 듯 묘사함으로써 그들에게 비로소 온전한 이름을 부여해 준다. ‘무지렁이’라 천대 받던 장인, 기술자들이 자신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폐쇄적인 스콜라 문화를 대신하여 새로운 지식의 모습을 보여준 것은 그 자체로 혁명이라 할 만하다. 비전(秘傳)에 의존하던 폐쇄적인 학문 풍토에서 지식의 공개와 누적적 진보를 몸소 실천한 것은 말 그대로 삶의 양식과 사고방식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온 ‘문화혁명’이었다. 고대의 문헌에 의지하던 학문 풍토에서 경험을 중시하고, 실험과 측정을 가능케 하였을 뿐 아니라 이를 속어로 기록하여 널리 공개하고, 누구든 거기에 새로운 사실을 덧붙일 수 있도록 한 16세기의 장인, 기술자들의 업적은, 설혹 그들이 당시 그 의미를 스스로 깨닫지 못했다 하더라도 의미 있는 것이었다는 얘기다.

◆ 닫힌 지식에서 열린 지식으로, 우리가 몰랐던 새로운 지식 탄생의 역사
200여 장의 풍부한 도판과 수백 권의 자료를 통해 생생히 되살리다
16세기 이전까지 학문은 어디까지나 문서 편중의 지식이었다. 또 그때까지 “학문이라는 것은 하느님이 부여한 신성한 것으로, 선택된 사람만이 전승하는 것으로 아무에게나 가르쳐 주어서는 안 된다. 일반 대중은 사악한 마음으로 신의 지식을 악용하려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이에 반해 16세기의 도예공 베르나르 팔리시는 문자 문화의 세계에서 소외당하던 당시 직인, 예술가, 외과의(당시 수술을 하거나 붕대를 감는 등 손을 더럽히는 일은 이발외과의, 즉 직인의 일이었다)들이 자신들의 언어(속어)로 발언해야 함을 분명히 밝힌다. “질병이나 기타 해로운 질환에 듣는 훌륭한 치료법은 비밀로 다뤄져서는 안 됩니다. 농업의 비법도 감춰져서는 안 됩니다. 항해의 장애물이나 위험도 은폐되면 안 됩니다. 하느님의 말씀도 비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국가에 도움이 되는 모든 과학도 비밀로 취급되어서는 안 됩니다.”
15~16세기에 걸쳐 고대 라틴어 문헌이 엄밀히 복원되고 인쇄되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다 16세기 중반 이후에 그러한 책들이 각국의 언어(속어)로 번역돼 출판된 것은 문화·사상사에서 그리 주목 받지 못했다. 저자에 따르면 속어 번역은 정확한 고전어의 번역만큼의, 혹은 그 이상의 중요성과 의미를 지닌다. 이를 통해 학문의 공개성이 보증되고, 또한 연구 활동에 수많은 사람들의 참여를 촉발시키기 되기 때문이다. 또한 3차원 공간의 풍경을 2차원 평면에 비추는 투시도법(원근법)의 발견은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와 건축가들의 손에서 이뤄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공학·기계학·건축 설계에 필요한 분해조립도법·단면도법·투명도법, 혹은 뒤에 화법기학학으로 불리게 된 기술의 원형도 15~16세기 화가와 직인들이 고안한 것이다. 실제로 제대로 된 전문용어가 정착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들 도판은 지식 전달에 필수 불가결한 것이었다.
이 밖에도 저자 야마모토 요시타카는 수많은 도판과 사례와 자료를 제시함으로써 지식의 공개와 누적적 진보라는 근대적 사상이 16세기 직인들의 기술과 실천을 통해 어떻게 싹텄는지를 한 장의 세밀화를 들여다보듯 생생히 그려낸다. 실제로 200년이 지나 프랑스혁명 이후 학문이 모든 사람에게 진정하게 공개되고, 누구나 노력과 능력만 있으면 공부하여 습득할 수 있다는 생각이 정착되었다 하더라도 이를 최초로 생각하고 실천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의 생각이고, 이것이 진정한 ‘16세기 문화혁명’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목차

한국어판 출간에 부쳐

서문 전체를 조망하다
제1장 예술가에서 시작되다
제2장 외과의의 대두와 외과학의 발전
제3장 해부학과 식물학의 도상 표현
제4장 광산업·야금술·시금법
제5장 상업수학과 16세기 수학혁명
제6장 군사기술혁명과 기계학·역학의 발흥
제7장 천문학, 지리학 그리고 연구의 조직화
제8장 16세기 후반의 잉글랜드
제9장 16세기 유럽의 언어혁명
제10장 16세기 문화혁명과 17세기 과학혁명

저자 후기
역자 후기
미주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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