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양도서규장각 새로 읽는 우리 고전 008
동호문답: 조선의 군주론, 왕도정치를 말하다
- 발행사항
- 서울 : 아카넷, 2014
- 형태사항
- 190 p. : 삽화 ; 23 cm
- 총서사항
- 규장각 새로 읽는 우리 고전 ; 008
- 서지주기
- 참고문헌(p. 189-190) 수록
소장정보
위치 | 등록번호 | 청구기호 / 출력 | 상태 | 반납예정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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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외도서 | G100817 | 대출가능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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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번호
- G100817
- 상태/반납예정일
- 대출가능
- -
- 위치/청구기호(출력)
- 연구외도서
책 소개
“먼저 잘못된 법을 개혁하여 민생을 구해야 합니다.
잘못된 법을 개혁하고자 하면 마땅히 언로(言路)를 넓혀서 좋은 방책을 모아야 합니다.
위로는 고관으로부터 아래로는 노비에 이르기까지 모두 당면한 문제점을 각자 말하도록 하여
그 말이 과연 쓸 만한 것이라면, 신분의 높고 낮음에 상관없이 취해야 합니다.
그런 후에야 나라에 희망이 있을 것입니다.” -『동호문답』,「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방법」중에서
조선의 군주론은 이처럼 우아하다
마키아벨리가 쓴 서양의 군주론은 국가와 군주에 관한 역사적 고찰이다. 중세의 도덕률이나 종교관에서 벗어나 있는 강력한 군주만이 분열된 이탈리아를 구원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한걸음 더 나아가 군주는 신하와 백성들의 사랑을 받기보다 오히려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편이 더 낫다고 이야기한다. 사랑이란 신하와 백성들이 군주에게 주는 것이므로, 그것을 거두어들이는 것 역시 그들에게 주도권이 있다. 인간의 변덕을 감안할 때, 신민의 사랑에 기대는 군주는 언제 자신의 기반을 잃을지 모른다. 반면 두려움이나 경외감은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므로 스스로의 통제권 아래에 있다. 군주가 신민으로부터 사랑도 받고 경외심도 불러일으킨다면 더 말할 나위가 없겠지만, 그것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차라리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편이 더 안전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의 군주론, 즉 『동호문답』에서는 ‘임금의 도’를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가. 임금와 신하가 함께 다스린다[君臣共治]는 의미에서 서양의 그것과는 그 맥이 다르다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임금에게 있던 정치의 주도권을 신하와 함께 나눈다는 것 자체가 보다 세련된 정치사상이지 않을까. 임금은 어진 신하를 구하여 귀히 쓰고, 어진 신하는 백성의 어려움을 두루 살펴 바른 정치를 펴는 것을 으뜸으로 적고 있다. 그리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임금의 역할, 신하의 역할, 이것이 이루어지기 어려움 등을 나열하며 그 현실적 가능성을 모색한다.
위기에 처한 조선, 율곡 이이의 고민
‘규장각 새로 읽는 우리 고전’ 시리즈의 여덟 번째 책, 『동호문답』은 홍문관 교리였던 이이가 ‘사가독서제’의 혜택을 받아 동호독서당에 머물면서 왕에게 월과(月課)로 지어올린 일종의 보고서다. 사가독서제는 세종 대에 처음 도입된 제도로, 촉망받는 젊은 학자관료가 자택이나 사찰 등에 머물면서 독서와 연구를 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였다. 그러나 자택에 머물면서는 독서에 매진하기 힘들었고, 유학자들이 사찰에 머무는 것도 마뜩치 않아 했다. 그래서 성종과 중종 대에 풍광 좋은 곳에 독서당을 짓고 젊고 능력이 출중한 문신, 학자, 관료들을 이곳에 보내 재충전의 기회를 갖도록 했다. 궁중 음식을 전담하는 기관인 태관(太官)에서 만든 음식이 끊이지 않고, 옥으로 장식한 수레와 말을 내린 것만 보아도 독서당에 대한 왕의 관심이 얼마나 높았는지를 알 수 있다.
과거시험에 아홉 번이나 장원을 차지한 이이가 독서당에 든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이는 영예로운 독서당에 와서도 쉽게 잠들지 못했다. 당시 조선 사회는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개국한 지 150년, 조선 초기의 질서는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었고 사회적 갈등은 커져만 갔다. 당대 최고의 엘리트였던 이이는 이 같은 조선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자신의 생각을 왕에게 지어 올린다. 이것이 바로 『동호문답』이다.
새로운 조선의 설계자, 이이가 꿈꾸었던 나라
16세기는 조선 초기에 만든 질서가 와해되면서 기존 질서를 대체할 새로운 질서, 새로운 설계를 시도하려는 노력이 줄기차게 이어졌다. 정치권력의 교체뿐만 아니라 이전까지의 경제 질서, 사회 구성, 신분의 변화가 이 시기에 급속도로 이루어진다. 이런 중요한 시기에 사림은 훈구와의 정치 대결이었던 사화(士禍)에서 번번이 패했다. 가혹한 현실을 경험한 사림 세력은 당장 정치를 바꾸기보다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이념을 찾는 일에 매달렸다. 새로운 이념을 제시하여 새로운 조선을 건설하고자 시도한다. 대표적인 인물이 이황이다.
이황은 주자성리학을 조선의 현실에 맞게 읽어내 주희의 사상을 그대로 따르기보다 주체적으로 해석하고 이해했다. 이이 역시 이황의 뒤를 이어 당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종합적인 개혁안을 제시했다. 이황이 주자성리학으로 조선을 이끌어 갈 새로운 이념의 방향을 잡았다면, 이이는 현실정치에 보다 적극적인 목소리를 냈다. 이이는 『성학집요(聖學輯要)』에서 왕의 역할과 경세론을 펼쳐 새로운 조선의 청사진을 제시하였다.
이이의 정치사상에 따르면, 정치는 임금의 자의(自意)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임금과 신하가 함께하는 것이다. 특히 신하의 정치 참여가 중요하다. 왕은 어진 신하를 알아보고, 그가 바른 정치를 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는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이는 같은 시기의 중국을 포함하여 동아시아에서 유래를 찾기 힘든 매우 특이한 정치형태였다. 이와 같은 이이의 주장은 조선 후기에 현실화됨으로써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조선 중기와 후기에 붕당정치가 실현되는 토대가 되었다. 또 성리학에 입각한 왕도정치와 군사론(君師論)은 조선 후기 군주들에게 하나의 전범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조선 사회에도 실질적인 영향이 컸다. 구체적인 개혁책의 하나로 제시된 공납의 개혁은 ‘대동법’으로, 군정(軍政)의 개혁 역시 균역법(均役法)으로 실현되었다. 400여 년 전 위기에 처한 조선을 새로이 하기 위한 이이의 고민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하겠다.
잘못된 법을 개혁하고자 하면 마땅히 언로(言路)를 넓혀서 좋은 방책을 모아야 합니다.
위로는 고관으로부터 아래로는 노비에 이르기까지 모두 당면한 문제점을 각자 말하도록 하여
그 말이 과연 쓸 만한 것이라면, 신분의 높고 낮음에 상관없이 취해야 합니다.
그런 후에야 나라에 희망이 있을 것입니다.” -『동호문답』,「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방법」중에서
조선의 군주론은 이처럼 우아하다
마키아벨리가 쓴 서양의 군주론은 국가와 군주에 관한 역사적 고찰이다. 중세의 도덕률이나 종교관에서 벗어나 있는 강력한 군주만이 분열된 이탈리아를 구원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한걸음 더 나아가 군주는 신하와 백성들의 사랑을 받기보다 오히려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편이 더 낫다고 이야기한다. 사랑이란 신하와 백성들이 군주에게 주는 것이므로, 그것을 거두어들이는 것 역시 그들에게 주도권이 있다. 인간의 변덕을 감안할 때, 신민의 사랑에 기대는 군주는 언제 자신의 기반을 잃을지 모른다. 반면 두려움이나 경외감은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므로 스스로의 통제권 아래에 있다. 군주가 신민으로부터 사랑도 받고 경외심도 불러일으킨다면 더 말할 나위가 없겠지만, 그것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차라리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편이 더 안전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의 군주론, 즉 『동호문답』에서는 ‘임금의 도’를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가. 임금와 신하가 함께 다스린다[君臣共治]는 의미에서 서양의 그것과는 그 맥이 다르다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임금에게 있던 정치의 주도권을 신하와 함께 나눈다는 것 자체가 보다 세련된 정치사상이지 않을까. 임금은 어진 신하를 구하여 귀히 쓰고, 어진 신하는 백성의 어려움을 두루 살펴 바른 정치를 펴는 것을 으뜸으로 적고 있다. 그리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임금의 역할, 신하의 역할, 이것이 이루어지기 어려움 등을 나열하며 그 현실적 가능성을 모색한다.
위기에 처한 조선, 율곡 이이의 고민
‘규장각 새로 읽는 우리 고전’ 시리즈의 여덟 번째 책, 『동호문답』은 홍문관 교리였던 이이가 ‘사가독서제’의 혜택을 받아 동호독서당에 머물면서 왕에게 월과(月課)로 지어올린 일종의 보고서다. 사가독서제는 세종 대에 처음 도입된 제도로, 촉망받는 젊은 학자관료가 자택이나 사찰 등에 머물면서 독서와 연구를 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였다. 그러나 자택에 머물면서는 독서에 매진하기 힘들었고, 유학자들이 사찰에 머무는 것도 마뜩치 않아 했다. 그래서 성종과 중종 대에 풍광 좋은 곳에 독서당을 짓고 젊고 능력이 출중한 문신, 학자, 관료들을 이곳에 보내 재충전의 기회를 갖도록 했다. 궁중 음식을 전담하는 기관인 태관(太官)에서 만든 음식이 끊이지 않고, 옥으로 장식한 수레와 말을 내린 것만 보아도 독서당에 대한 왕의 관심이 얼마나 높았는지를 알 수 있다.
과거시험에 아홉 번이나 장원을 차지한 이이가 독서당에 든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이는 영예로운 독서당에 와서도 쉽게 잠들지 못했다. 당시 조선 사회는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개국한 지 150년, 조선 초기의 질서는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었고 사회적 갈등은 커져만 갔다. 당대 최고의 엘리트였던 이이는 이 같은 조선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자신의 생각을 왕에게 지어 올린다. 이것이 바로 『동호문답』이다.
새로운 조선의 설계자, 이이가 꿈꾸었던 나라
16세기는 조선 초기에 만든 질서가 와해되면서 기존 질서를 대체할 새로운 질서, 새로운 설계를 시도하려는 노력이 줄기차게 이어졌다. 정치권력의 교체뿐만 아니라 이전까지의 경제 질서, 사회 구성, 신분의 변화가 이 시기에 급속도로 이루어진다. 이런 중요한 시기에 사림은 훈구와의 정치 대결이었던 사화(士禍)에서 번번이 패했다. 가혹한 현실을 경험한 사림 세력은 당장 정치를 바꾸기보다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이념을 찾는 일에 매달렸다. 새로운 이념을 제시하여 새로운 조선을 건설하고자 시도한다. 대표적인 인물이 이황이다.
이황은 주자성리학을 조선의 현실에 맞게 읽어내 주희의 사상을 그대로 따르기보다 주체적으로 해석하고 이해했다. 이이 역시 이황의 뒤를 이어 당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종합적인 개혁안을 제시했다. 이황이 주자성리학으로 조선을 이끌어 갈 새로운 이념의 방향을 잡았다면, 이이는 현실정치에 보다 적극적인 목소리를 냈다. 이이는 『성학집요(聖學輯要)』에서 왕의 역할과 경세론을 펼쳐 새로운 조선의 청사진을 제시하였다.
이이의 정치사상에 따르면, 정치는 임금의 자의(自意)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임금과 신하가 함께하는 것이다. 특히 신하의 정치 참여가 중요하다. 왕은 어진 신하를 알아보고, 그가 바른 정치를 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는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이는 같은 시기의 중국을 포함하여 동아시아에서 유래를 찾기 힘든 매우 특이한 정치형태였다. 이와 같은 이이의 주장은 조선 후기에 현실화됨으로써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조선 중기와 후기에 붕당정치가 실현되는 토대가 되었다. 또 성리학에 입각한 왕도정치와 군사론(君師論)은 조선 후기 군주들에게 하나의 전범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조선 사회에도 실질적인 영향이 컸다. 구체적인 개혁책의 하나로 제시된 공납의 개혁은 ‘대동법’으로, 군정(軍政)의 개혁 역시 균역법(均役法)으로 실현되었다. 400여 년 전 위기에 처한 조선을 새로이 하기 위한 이이의 고민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하겠다.
목차
해제ㅣ조선적인 왕도정치를 위한 지침서
1 임금의 도리
2 신하의 도리
3 군신이 서로 만나기 어려움을 논하다
4 우리나라에서 도학이 행해지지 않음을 논하다
5 조선이 옛 도를 회복하지 못함에 관하여
6 지김의 시세를 논하다
7 무실이 수기의 핵심
8 간사한 자를 분별함이 용현의 요체
9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방법
10 백성을 교화하는 방법
11 정명이 정치의 근본
주석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