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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외도서 | G100506 | 대출가능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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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10년의 연구기간을 거쳐 출간된 서남동양학술총서 『대한민국 헌법의 탄생: 한국 헌정사, 만민공동회에서 제헌까지』는 우리 헌법의 역사성과 근대성의 기원을 함께 탐구하는 흥미로운 연구서이다. 법학·정치학·역사학을 종합한 학제적 연구를 통해 기존 인식을 넘어서서 우리 헌법의 자생적 뿌리를 밝혔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그간 학계는 우리 헌법을 해방 후 진주한 미국의 ‘작품’으로 보아왔다. 건국헌법이 자유민주주의를 택한 것, 민주공화국이 된 것이 모두 미국의 영향이라는 것이다. 또한 한국 근대헌법의 핵심원리는 자유시장주의라는 것이 보편적 인식이었다.
이 책은 기존 연구들의 이런 인식에 대해 건국헌법의 제정과정과 기원을 종합적으로 탐구할 것을 요청한다. 헌법의 기본정신이자 대한민국의 정체(正體)인 민주공화(民主共和)의 기원을 1848년 만민공동회에 둔다. 독립운동, 즉 반제국주의 운동으로만 기억되어온 3·1운동의 헌정사적 의미를 새롭게 탐색하여 대중의 정치참여를 통해 민주공화를 구현한 운동으로 파악한다. 자유주의 시장경제를 원칙으로 한 우리 헌법의 바탕에 균평·균등 이념이 강하게 스며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북한헌법의 제정과정과 남북한 헌법안을 비교함으로써 두 헌법이 같은 뿌리에서 출발한 쌍생아적 관계임을 밝힌다. 헌법이 정치세력들 간의 힘의 산물일 뿐만 아니라, 사회구성원 전체의 역사적 경험을 통해 이루어지는 공동의 합의임을 학제적 연구를 통해 종합적으로 밝혔다는 점에서 『대한민국 헌법의 탄생』은 진일보한 성취를 이룬 연구서이다.
헌법의 기원과 제정을 둘러싼 문제들
‘민주공화’의 기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헌법 1조 1항)라는 인식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이 책은 한국 근대헌법의 시원을 끌어올려 1898년 만민공동회가 의결한 <헌의6조>에 둔다. 기존에 시원으로 파악해온 갑오개혁의 <홍범14조>(1895)가 위로부터의 개혁안인 반면, 만민공동회의 <헌의6조>는 대중적 참여와 정치운동을 거쳐 제시된 합의사항으로 근대적 성격에 부합한다는 점을 평가한 것이다. 백성이 왕을 직접 면담하고 민회(民會)를 구성하는 등 정치적 주체로 나선 점에서 만민공동회는 한국 민주공화정치 운동의 기원으로 보기에 손색이 없다. 만민공동회가 주장한 ‘군민공치’는 1907년 고종 퇴위와 함께 본격화된 입헌정치 논의 속에서 민주공화제로 구체화되었다.
한국 헌법의 원형헌법: 대한민국임시정부 헌법
이런 사회적 분위기와 시대정신이 응집해 폭발한 것이 3·1운동이다. 독립운동, 반제국주의운동으로만 평가되어온 3·1운동은 헌정사적으로 볼 때 민주공화제를 지지한 근대 정치혁명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3·1운동은 반일운동이면서 민족 내 정치투쟁의 일환이었고, 그 정치이념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구체화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헌법이 해석한 3·1운동의 정치이념은 민주공화주의였다.
1919년의 유산은 1946년 헌법쟁론기를 거쳐 1948년 건국헌법 제정으로 이어졌다. 민주공화제·국민주권·기본권·권력분립 등 임시정부 헌법의 기본원칙들은 모두 이 건국헌법에 수용되었다. 전문, 총강, 국민의 권리와 의무, 입법부·행정부·사법부·경제·회계·재정, 헌법 개정 및 부칙으로 구성된 체계와 용어도 아주 유사하다. 임시정부 헌법은 모든 한국 근현대 헌법의 원형헌법인 것이다.
균평·균등 이념이 바탕이 된 자유시장주의
사유재산권과 사적 경영을 보장하는 한국 헌법에서 자유주의 시장경제의 원칙은 확고한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한국 헌법에는 균평·균등 이념의 자취가 강하게 스며 있다. 이 이념은 ‘민주주의’를 둘러싼 독립운동세력들의 분열을 극복하고 조정하는 과정에서 체계화되고, 이후 사회주의와의 대결 속에서 성장한 것이다. 해방후 민족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계급혁명으로 인한 민족의 분열을 막기 위해 공산주의자들의 요구를 균등이념으로 광범위하게 포섭하려 한 결과물인 것이다. 국민의 균등한 정치참여, 경제의 국유·국영부문 인정, 공공복리를 위해 개인의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는 조항 등은 모두 이러한 집단적 역사적 경험의 결과물이다.
삼균주의와 조소앙의 역할
헌법과 헌법정신의 기원을 1898년 대중의 정치참여에 둔다면 건국헌법 제정과정에서 조소앙(趙素?)의 역할은 재평가되어야 한다. 1945~48년 해방정국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한 것은 유진오(兪鎭午)이지만, 일제강점기 이래 독립운동과 해방 후 건국과정까지를 놓고 보면 근대한국의 헌법과 헌정을 가장 깊이있게 성찰한 인물은 조소앙이다. <대한민국임시헌장>(1919.4) <대한민국건국강령>(1941) <대한민국임시헌장>(1944) 제정을 모두 주도한 조소앙의 사상과 영향을 재평가할 필요는 충분하다.
미국의 대한정책이 제헌에 미친 영향
1946~48년은 시민사회의 다양한 정치세력들이 헌법이념과 국가체제 구상, 정치경제적 비전을 가장 풍부하게 제시한 시기였다. 이 구상들은 우리 헌법이 한 법률가나 특정 정치인, 또는 외세의 일방적 영향이 아닌, 자생적 기원과 주체적 참여 속에 이루어진 공동의 역사적 산물임을 알려준다.
1946년 반탁운동이 남한을 휩쓸자, 찬탁을 옹호하던 미국은 그해 12월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을 설치해 좌우 합작파를 지원하고 과도적 헌법안을 구상했다. 미군정 법률고문 우돌(E. Woodall)이 작성한 <조선헌법>은 남한 정치지도자와 미군정의 상당한 합의를 이끌어냈으며, 과도입법의원이 제정한 <남조선과도행정조직법 초안> <남조선과도입법의원법안> 등에 큰 영향을 주었다.
해방 후 각 정파의 헌법안들: 자유와 균등의 문제
1946년 미소공위가 각 정파에 한국 헌법 관련 질의서를 보내고 이에 대해 각 정파가 「답신안」을 제출하면서 제헌 논의는 본격화했다. 크게 민주주의민족전선(좌파)의 <조선민주공화국 임시약법 시안>과 행정연구위원회(우파)의 <한국헌법>(이후 <유진오-행정연구위원회 공동안>으로 재제정), 비상국민회의(중도파,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의 모태가 됨) 등으로 나뉘었다. 최종적으로 미국의 지원을 받아 비상국민회의와 민주의원이 기초한 <대한민국임시헌법>(1946.3)이 통과되었다. <대한민국임시헌법>은 임시정부의 <대한민국임시헌장>(1944)을 거의 계승한 것이다.
정치적 입장은 다양했으나 경제의 기본원칙에서 국유화와 공유를 강조한 것은 공통적이다. 심지어 사유재산과 영업의 자유를 원칙으로 한 우파의 <한국헌법>조차도 토지분배와 국영 대외무역 등으로 사회민주주의적 요소를 강하게 갖고 있었다. 이러한 토대는 ‘민족 전체의 발전’이 최우선 과제였던 시대의 산물이었다.
정부형태와 대통령 권한을 둘러싼 논쟁
다양한 입장의 참여와 활발한 논의 끝에 제헌헌법이 제정된 1948년 이후는 이승만이라는 강력한 개인이 구체적인 정치현실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시기이다. 내각책임제냐와 대통령중심제냐의 정부형태를 둘러싼 격렬한 논쟁은 흔히 이승만의 전적인 주도로 대통령제로 귀결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초안과 확정본을 비교해보면 대통령제가 관철된 뒤에도 대통령의 권한을 제한하여 독주를 견제하려는 다양한 시도들이 있었고, 그중 일부는 성공했음을 알 수 있다. 반내각제운동을 선언함으로써 간신히 대통령제를 관철할 수 있었던 데서 보듯 이승만이 시종일관 주도적 위치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남북한 헌법의 공통점과 차이점
근대국가의 정치원리로 공히 민주주의를 택했지만 남북한이 이를 해석하고 구현하는 방식은 아주 달랐다. 이런 점에서 남북한 헌법 제정과정의 차이는 단지 절차와 형식상의 차이에 그치지 않는다. 북한은 쏘비에뜨(인민위원회)의 원리에 따라 주권의 대표성을 중심으로 제정절차를 진행했다. 남한은 의회민주주의의 원리에 따라 의견의 다양성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선거에 의해 대표를 선출한다는 점에서 같지만, 인민위원회의 원리를 채택한 북한의 제정과정에서는 반대나 타협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남한이 권력분립에 의한 견제와 균형을 목표로 했다면, 북한은 인민주권·절대주의의 원리를 따랐다. 주권의 양도불가능성을 전제로 주권 자체를 어떻게 완전히 구현할 것인가에 집중한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인식처럼 북한헌법이 소련 지도부의 의사대로, 소련헌법을 그대로 모방한 것은 아니다. 북한헌법이 소련헌법을 모본으로 기초된 것은 확실하지만, 한편으로 그 심의과정에서는 남한헌법을 부단히 의식하였다. 남한헌법이 미군정의 영향하에서 북한과의 체제적 반대항을 지향한 것과 같다. 이런 의미에서 남북한 헌법은 상호맥락성을 가지며, 쌍생아적 성격을 지녔다.
남북한 헌법은 경제원리에서 중요자원의 국유화, 국영기관의 관리, 특정 부문에 대한 계획경제라는 유사성을 가진다. 민족경제의 부흥, 부의 독점 금지, 실질적인 평등의 보호를 제시하는 점도 유사하다. 그러나 현실의 제도에서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궁극적인 국유와 국가관리를 추구하는 북한과 달리 필요에 의한 국가 소유를 추구하는 것이 남한 헌법의 차이이다.
이 책은 우리 헌법의 기원과 제정에 관한 다양한 주제를 각기 헌법 태동기(1898~1945년), 헌법 쟁론기(1945년 해방~1948년 정부수립 이전), 헌법 제정기(1948년 6~7월)로 나누어 다루고 있다. 시기마다 역사적 사실과 정치현실, 사상적 의미와 법학적 함의를 연결하여 50년 헌정사를 생생하게 파헤친 역작이다.
그간 학계는 우리 헌법을 해방 후 진주한 미국의 ‘작품’으로 보아왔다. 건국헌법이 자유민주주의를 택한 것, 민주공화국이 된 것이 모두 미국의 영향이라는 것이다. 또한 한국 근대헌법의 핵심원리는 자유시장주의라는 것이 보편적 인식이었다.
이 책은 기존 연구들의 이런 인식에 대해 건국헌법의 제정과정과 기원을 종합적으로 탐구할 것을 요청한다. 헌법의 기본정신이자 대한민국의 정체(正體)인 민주공화(民主共和)의 기원을 1848년 만민공동회에 둔다. 독립운동, 즉 반제국주의 운동으로만 기억되어온 3·1운동의 헌정사적 의미를 새롭게 탐색하여 대중의 정치참여를 통해 민주공화를 구현한 운동으로 파악한다. 자유주의 시장경제를 원칙으로 한 우리 헌법의 바탕에 균평·균등 이념이 강하게 스며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북한헌법의 제정과정과 남북한 헌법안을 비교함으로써 두 헌법이 같은 뿌리에서 출발한 쌍생아적 관계임을 밝힌다. 헌법이 정치세력들 간의 힘의 산물일 뿐만 아니라, 사회구성원 전체의 역사적 경험을 통해 이루어지는 공동의 합의임을 학제적 연구를 통해 종합적으로 밝혔다는 점에서 『대한민국 헌법의 탄생』은 진일보한 성취를 이룬 연구서이다.
헌법의 기원과 제정을 둘러싼 문제들
‘민주공화’의 기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헌법 1조 1항)라는 인식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이 책은 한국 근대헌법의 시원을 끌어올려 1898년 만민공동회가 의결한 <헌의6조>에 둔다. 기존에 시원으로 파악해온 갑오개혁의 <홍범14조>(1895)가 위로부터의 개혁안인 반면, 만민공동회의 <헌의6조>는 대중적 참여와 정치운동을 거쳐 제시된 합의사항으로 근대적 성격에 부합한다는 점을 평가한 것이다. 백성이 왕을 직접 면담하고 민회(民會)를 구성하는 등 정치적 주체로 나선 점에서 만민공동회는 한국 민주공화정치 운동의 기원으로 보기에 손색이 없다. 만민공동회가 주장한 ‘군민공치’는 1907년 고종 퇴위와 함께 본격화된 입헌정치 논의 속에서 민주공화제로 구체화되었다.
한국 헌법의 원형헌법: 대한민국임시정부 헌법
이런 사회적 분위기와 시대정신이 응집해 폭발한 것이 3·1운동이다. 독립운동, 반제국주의운동으로만 평가되어온 3·1운동은 헌정사적으로 볼 때 민주공화제를 지지한 근대 정치혁명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3·1운동은 반일운동이면서 민족 내 정치투쟁의 일환이었고, 그 정치이념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구체화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헌법이 해석한 3·1운동의 정치이념은 민주공화주의였다.
1919년의 유산은 1946년 헌법쟁론기를 거쳐 1948년 건국헌법 제정으로 이어졌다. 민주공화제·국민주권·기본권·권력분립 등 임시정부 헌법의 기본원칙들은 모두 이 건국헌법에 수용되었다. 전문, 총강, 국민의 권리와 의무, 입법부·행정부·사법부·경제·회계·재정, 헌법 개정 및 부칙으로 구성된 체계와 용어도 아주 유사하다. 임시정부 헌법은 모든 한국 근현대 헌법의 원형헌법인 것이다.
균평·균등 이념이 바탕이 된 자유시장주의
사유재산권과 사적 경영을 보장하는 한국 헌법에서 자유주의 시장경제의 원칙은 확고한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한국 헌법에는 균평·균등 이념의 자취가 강하게 스며 있다. 이 이념은 ‘민주주의’를 둘러싼 독립운동세력들의 분열을 극복하고 조정하는 과정에서 체계화되고, 이후 사회주의와의 대결 속에서 성장한 것이다. 해방후 민족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계급혁명으로 인한 민족의 분열을 막기 위해 공산주의자들의 요구를 균등이념으로 광범위하게 포섭하려 한 결과물인 것이다. 국민의 균등한 정치참여, 경제의 국유·국영부문 인정, 공공복리를 위해 개인의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는 조항 등은 모두 이러한 집단적 역사적 경험의 결과물이다.
삼균주의와 조소앙의 역할
헌법과 헌법정신의 기원을 1898년 대중의 정치참여에 둔다면 건국헌법 제정과정에서 조소앙(趙素?)의 역할은 재평가되어야 한다. 1945~48년 해방정국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한 것은 유진오(兪鎭午)이지만, 일제강점기 이래 독립운동과 해방 후 건국과정까지를 놓고 보면 근대한국의 헌법과 헌정을 가장 깊이있게 성찰한 인물은 조소앙이다. <대한민국임시헌장>(1919.4) <대한민국건국강령>(1941) <대한민국임시헌장>(1944) 제정을 모두 주도한 조소앙의 사상과 영향을 재평가할 필요는 충분하다.
미국의 대한정책이 제헌에 미친 영향
1946~48년은 시민사회의 다양한 정치세력들이 헌법이념과 국가체제 구상, 정치경제적 비전을 가장 풍부하게 제시한 시기였다. 이 구상들은 우리 헌법이 한 법률가나 특정 정치인, 또는 외세의 일방적 영향이 아닌, 자생적 기원과 주체적 참여 속에 이루어진 공동의 역사적 산물임을 알려준다.
1946년 반탁운동이 남한을 휩쓸자, 찬탁을 옹호하던 미국은 그해 12월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을 설치해 좌우 합작파를 지원하고 과도적 헌법안을 구상했다. 미군정 법률고문 우돌(E. Woodall)이 작성한 <조선헌법>은 남한 정치지도자와 미군정의 상당한 합의를 이끌어냈으며, 과도입법의원이 제정한 <남조선과도행정조직법 초안> <남조선과도입법의원법안> 등에 큰 영향을 주었다.
해방 후 각 정파의 헌법안들: 자유와 균등의 문제
1946년 미소공위가 각 정파에 한국 헌법 관련 질의서를 보내고 이에 대해 각 정파가 「답신안」을 제출하면서 제헌 논의는 본격화했다. 크게 민주주의민족전선(좌파)의 <조선민주공화국 임시약법 시안>과 행정연구위원회(우파)의 <한국헌법>(이후 <유진오-행정연구위원회 공동안>으로 재제정), 비상국민회의(중도파,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의 모태가 됨) 등으로 나뉘었다. 최종적으로 미국의 지원을 받아 비상국민회의와 민주의원이 기초한 <대한민국임시헌법>(1946.3)이 통과되었다. <대한민국임시헌법>은 임시정부의 <대한민국임시헌장>(1944)을 거의 계승한 것이다.
정치적 입장은 다양했으나 경제의 기본원칙에서 국유화와 공유를 강조한 것은 공통적이다. 심지어 사유재산과 영업의 자유를 원칙으로 한 우파의 <한국헌법>조차도 토지분배와 국영 대외무역 등으로 사회민주주의적 요소를 강하게 갖고 있었다. 이러한 토대는 ‘민족 전체의 발전’이 최우선 과제였던 시대의 산물이었다.
정부형태와 대통령 권한을 둘러싼 논쟁
다양한 입장의 참여와 활발한 논의 끝에 제헌헌법이 제정된 1948년 이후는 이승만이라는 강력한 개인이 구체적인 정치현실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시기이다. 내각책임제냐와 대통령중심제냐의 정부형태를 둘러싼 격렬한 논쟁은 흔히 이승만의 전적인 주도로 대통령제로 귀결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초안과 확정본을 비교해보면 대통령제가 관철된 뒤에도 대통령의 권한을 제한하여 독주를 견제하려는 다양한 시도들이 있었고, 그중 일부는 성공했음을 알 수 있다. 반내각제운동을 선언함으로써 간신히 대통령제를 관철할 수 있었던 데서 보듯 이승만이 시종일관 주도적 위치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남북한 헌법의 공통점과 차이점
근대국가의 정치원리로 공히 민주주의를 택했지만 남북한이 이를 해석하고 구현하는 방식은 아주 달랐다. 이런 점에서 남북한 헌법 제정과정의 차이는 단지 절차와 형식상의 차이에 그치지 않는다. 북한은 쏘비에뜨(인민위원회)의 원리에 따라 주권의 대표성을 중심으로 제정절차를 진행했다. 남한은 의회민주주의의 원리에 따라 의견의 다양성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선거에 의해 대표를 선출한다는 점에서 같지만, 인민위원회의 원리를 채택한 북한의 제정과정에서는 반대나 타협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남한이 권력분립에 의한 견제와 균형을 목표로 했다면, 북한은 인민주권·절대주의의 원리를 따랐다. 주권의 양도불가능성을 전제로 주권 자체를 어떻게 완전히 구현할 것인가에 집중한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인식처럼 북한헌법이 소련 지도부의 의사대로, 소련헌법을 그대로 모방한 것은 아니다. 북한헌법이 소련헌법을 모본으로 기초된 것은 확실하지만, 한편으로 그 심의과정에서는 남한헌법을 부단히 의식하였다. 남한헌법이 미군정의 영향하에서 북한과의 체제적 반대항을 지향한 것과 같다. 이런 의미에서 남북한 헌법은 상호맥락성을 가지며, 쌍생아적 성격을 지녔다.
남북한 헌법은 경제원리에서 중요자원의 국유화, 국영기관의 관리, 특정 부문에 대한 계획경제라는 유사성을 가진다. 민족경제의 부흥, 부의 독점 금지, 실질적인 평등의 보호를 제시하는 점도 유사하다. 그러나 현실의 제도에서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궁극적인 국유와 국가관리를 추구하는 북한과 달리 필요에 의한 국가 소유를 추구하는 것이 남한 헌법의 차이이다.
이 책은 우리 헌법의 기원과 제정에 관한 다양한 주제를 각기 헌법 태동기(1898~1945년), 헌법 쟁론기(1945년 해방~1948년 정부수립 이전), 헌법 제정기(1948년 6~7월)로 나누어 다루고 있다. 시기마다 역사적 사실과 정치현실, 사상적 의미와 법학적 함의를 연결하여 50년 헌정사를 생생하게 파헤친 역작이다.
목차
서남동양학술총서 간행사│21세기에 다시 쓴 간행사
책머리에
제1장 서론
1. 대한민국 헌법의 기원에 관한 질문
2. 대한민국 헌법의 제정에 관한 질문
3. 선행연구와 접근방법
제2장 대한민국 헌법의 역사적 기원(1898~1945): ‘군주제’의 종언과 ‘민주공화제’의 시작
1. 서론
2. 만민공동회와 <대한국국제>: ‘군민공치’에서 전제군주제로의 퇴행
3. 고종황제 퇴위삭건: 전제군주제의 종언과 공화제의 시작
4.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민주공화제의 탄생
5. 대한민국 헌법의 기원과 이념
6. 소결: 건국헌법의 시원과 연속성
제3장 해방정국의 정치투쟁과 헌법논쟁(1945~48)
1. 서론
2. 민족자치노선과 국제협력노선의 대결(1): 미국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승인 반대
3. 민족자치노선과 국제협력노선의 대결(2): 반탁과 신탁을 둘러싼 정치통합
4. 미군정과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헌정구상, 그리고 미국의 대응
5. 소결: 해방정국에서 정치통합의 실패와 그 함의
제4장 해방정국의 시민사회 헌법안들(1946~47)
1. 서론
2. 좌파의 <임시약법 시안> <임시헌장 요강>, 민전의「답신안」
3. 우파의 <한국헌법>, 임협의「답신안」
4. 중도파의 <대한민국임시헌법>, 시협의「답신안」
5. 소결: ‘균등사회’를 지향한 시민사회 헌법안과 헌법 통합 실패
제5장 건국헌법 제정(1948) Ⅰ: 제헌국회의 헌법 초안 논의
1. 서론
2. 5.10선거와 제헌국회
3. 헌법기초 전형위원 및 기초위원 선정: ‘대표’의 원리에 대한 논쟁
4. 헌법안의 기초와 수정: 한민당의 의원내각제와 이승만의 대통령중심제 경쟁
5. 소결: 제도와 인격의 경쟁
제6장 건국헌법 제정(1948) Ⅱ:제헌국회의 정부형태 논의
1. 서론
2. 헌법 제정의 정치적 의미와 정부 구성원치에 관한 논쟁
3. 국회와 정부의 권한에 관한 상이한 해석
4. 헌법 심의과정과 이승만
5. 소결: 건국헌법 제정과정의 특징
제7장 북한헌법 제정과 남북한 헌법안 비교
1. 서론
2. 남북한 헌법의 제정과정과 특징: 민주주의 구성원리로서 일원적 ‘대표’와 ‘다양성’의 대립
3. 남북한 헌법안 비교: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한 두 가지 길
4. 소결: 역사와 정치의 역설─‘정의’와 ‘자유’에 관한 성찰
제8장 결론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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