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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외도서 | G100115 | 대출가능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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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몽골 제국과 한반도를 잇는 연결고리, 옷치긴
이제는 만주사다!
만주는 7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땅이다. 만주는 유목이다 농경이다 하는 어느 일방의 경제 환경이 아니라, 이 모두를 아우르는 천혜의 자연조건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만주에서 흥기한 세력은 대제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즉, 드넓은 몽골 스텝과 거대한 시베리아 벌판으로 연결되는 만주 지역은 생산력과 전력을 계속 확대?재생산해 낼 수 있어서 흉노 이래의 모든 동북아 고대 유목제국들이 태동했던 핵심 요충지이다. 스텝의 몽골리아에서 발흥한 정권도 만주를 장악해야만 거대한 세력으로 급성장했다. 또한 세계사에 이름을 남긴 거대 제국이라 할지라도 만주를 상실하게 되면 결국 약소국으로 전락하는 법칙을 지닌 곳이기도 하다. 흉노제국 이래 거란, 여진과 몽골제국 등이 한결같이 만주가 주는 혜택을 모태로 세계사에 걸출한 대제국으로 부상했다.
몽골제국시대 만주의 지배자는 칭기스칸의 말제 가문인 옷치긴 왕가이다. 옷치긴 왕가는 만주가 주는 경제적?군사적 풍요로움을 배경으로 몽?원제국사의 흐름 대세에 적지 않은 격랑과 격변을 초래케 했다. 특히, 대다수의 황금씨족이 아릭부케를 지지하는 상황에서 쿠빌라이가 몽골제국의 대칸으로 즉위하는 이변은 옷치긴 왕가가 주도했기에 가능했다. 또한 옷치긴 왕가의 계승자 나얀이 분권세력의 대표로써 중앙집권적 지배에 반기를 들고 일어나, 동?서제왕의 군사력을 결집시켜 대칸이 되려했던 것 역시 만주라는 이점이 크게 작용한 결과물이다.
이렇게 만주라는 배경을 향유했던 옷치긴 왕가는 때때로 체제 전복적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대칸이 되려고 쿠데타 기도를 감행했을 뿐만 아니라 반란 이후에도 여전히 자신들의 울루스를 독자적으로 경영할 만큼 끝내 실세로 엄존했다. 1315년에 옷치긴 왕가의 톡타는 요왕遼王의 일자왕호를 하사 받은 뒤, 1328년에 양도내전을 주도해 태정제의 아들 아리기바를 대칸으로 옹립했다. 양도내전에서 실패한 후에도 옷치긴 왕가의 야나스리가 요왕이 되어 울루스를 계속 통치했다. 더욱이 원 멸망 후에도 옷치긴 왕가의 아자스리는 주원장과의 타협을 통해 만주지역의 지배자로 남아있을 정도로 옷치긴 왕가는 국가의 중앙권력이 제어할 수 없는 막강한 독립 역량을 끝내 보유하고 있었다.
이렇듯 옷치긴 왕가가 제국 내에서 정치적 위상을 높이고, 독립적으로 울루스를 지배했음을 파악하는 것은 조선과 만주제국 등 향후 역사적 전개와 관련해 결정적인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고 본다. 옷치긴 왕가가 다져 놓은 만주 기반은 조선과 200년 후의 후금을 배태시키는 토대로 작용하고 있다.
옷치긴 왕가와 고려
옷치긴 왕가는 고려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즉, 옷치긴 왕가가 몽?원 제국과 고려를 연결하는 중간지점에 위치하는 지정학적 특수성은, 여?몽 관계의 변화를 주도하기도 하고 양 세력의 유착 관계에 따라서 견제받기도 하는 미묘한 입장에 놓여 있었다. 옷치긴 왕가와 고려의 인연은 옷치긴이 칭기스칸을 대신해 몽골리아를 통치한 1219년에 시작되어, 1225년 저고여 살해사건 때까지 고려에게 옷치긴은 가혹한 수탈을 징구한 주체였다. 또한 고려의 원종元宗은 쿠빌라이와 강화를 체결하면서 옷치긴 왕가의 수탈을 막아달라는 요청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쿠빌라이 정권 탄생의 일등 공신이었던 왕가의 타가차르는 오히려 고려의 서해도 일대까지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고 고려의 유민들이 옷치긴 왕가에 투탁할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고려에 행사했다.
쿠빌라이 카안에게 옷치긴 왕가는 자신을 즉위시킨 가장 강력한 우방인 동시에 두려움의 대상이 됐을 수도 있다. 결국 무섭게 확대되는 옷치긴 왕가의 세력을 제어하기 힘들었던 쿠빌라이는 충렬왕을 부마로 삼아 고려 국왕이 황금씨족 일원이 되게 함으로써 옷치긴 왕가와 세력 균형을 꾀하기도 했다. 이후 몽골의 대칸들은 충선왕忠宣王을 심왕瀋王으로 삼아 옷치긴 왕가의 남하를 방지하고 날로 확대되는 옷치긴 왕가를 고려와 분리해 견제하려 했다. 또한 충렬왕 이래 지속적인 통혼을 통해 대원제국은 고려의 내정 깊숙이 간섭해 실질적인 통제를 실시했고, 고려왕들은 쿠빌라이 카안의 부마로써 실추된 국왕의 권위나 정치적 지위를 확고히 할 수 있었다. 아울러 고려왕은 통혼을 통해 자동적으로 황금씨족의 일원이 되었기 때문에 대원제국 정치 중심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옷치긴 왕가라는 세력이 고려에 미친 영향은 몽골과 고려의 새로운 관계 정립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옷치긴 왕가와 이성계
무엇보다 옷치긴 왕가의 통치지역에서 기반을 확충하고 세력을 강화시킨 이들은 이성계 가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성계李成桂 가문과 옷치긴 왕가는 직간접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더 나아가 조선왕조의 건국 역시 옷치긴 왕가와의 관계 속에서 이해해 볼 수 있다. 우선 이성계의 고조부 이안사李安社는 옷치긴 왕가로부터 1255년에 남경南京 등지를 지배하던 천호장 겸 다루가치의 직위를 하사 받아서 이 일대를 세력기반으로 삼았다. 이후 이성계 가문은 천호장 겸 다루가치의 지위를 세습하여, 고려인과 여진인 등을 지배했기 때문에 옷치긴 왕가와 깊은 관계를 가진 세력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몽골의 전투방식과 산악전 모두 익숙했던 이성계는 한반도 내의 전투에만 익숙했던 당시의 다른 고려 장수들의 군사집단보다 더욱 강한 군사력을 발휘할 수 있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그 후 고려 말 최고의 실력자로 대두할 수 있었다.
한편, 원 멸망 후에, 어느 일국이 주도권을 잡지 못하고 고려?북원?명이 팽팽한 균형관계를 형성했던 14세기 말 동아시아 정세는 요동지역 군벌 출신인 나가추의 투항으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고려는 나가추라는 완충지대를 상실해서 명의 군사적 위협에 직접 노출됐으며, 최영을 중심으로 하는 무인세력들은 명의 철령위 설치에 반발해 요동을 정벌하려했다. 그러나 권문세족 출신인 최영과는 계급적 이해관계가 서로 달랐던 이성계는 최영의 요동정벌에 흔쾌히 동참키 어려웠다. 뿐만 아니라 이성계는 1387년 나가추 항복 이후 1388년 4월의 토구스 테무르칸 북원정권의 궤멸 소식과 몽골 지배계층의 투항 도미노 등으로 소멸해가는 북원의 실상을 꿰뚫어 보고, 1388년 5월에 마침내 위화도 회군을 결행했다. 따라서 1388년 5월의 위화도 회군은 옷치긴 왕가와 직간접으로 연결되어 몽골 내부사정을 잘 아는 이성계가 그 직전 북원의 기본 무력이 무너졌음을 파악한 데서 나온 14세기 말 동아시아 국제정치 상황의 결과물로 보아야 한다.
1392년 7월 이성계의 조선조 창업 역시 명의 대對옷치긴왕가 관계 정립과정의 일환으로 상호 조정된 일련의 동북아 신질서 형성과정의 소산이라 할 수도 있다. 즉, 원 멸망 후 1388년에 옷치긴 왕가는 영지 존립의 위기 상황 하에서 주원장에게 투항함으로서 다시 독립적 지배권을 유지하게 되었다. 옷치긴 왕가의 요왕 아자스리는 태녕위지휘사泰寧衛指揮使에 임명돼 명明정권과 비록 ‘책봉과 조공’이란 전통적 중화질서 속에 편입되기는 했으나 오히려 명조의 정치적 취약성과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일련의 약점 등을 이용해 더욱 강고한 울루스의 독립성을 확보함으로써 조선조의 창업과 200여년 후에 만주족의 청제국 탄생으로 연결되고 있다.
이제는 만주사다!
만주는 7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땅이다. 만주는 유목이다 농경이다 하는 어느 일방의 경제 환경이 아니라, 이 모두를 아우르는 천혜의 자연조건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만주에서 흥기한 세력은 대제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즉, 드넓은 몽골 스텝과 거대한 시베리아 벌판으로 연결되는 만주 지역은 생산력과 전력을 계속 확대?재생산해 낼 수 있어서 흉노 이래의 모든 동북아 고대 유목제국들이 태동했던 핵심 요충지이다. 스텝의 몽골리아에서 발흥한 정권도 만주를 장악해야만 거대한 세력으로 급성장했다. 또한 세계사에 이름을 남긴 거대 제국이라 할지라도 만주를 상실하게 되면 결국 약소국으로 전락하는 법칙을 지닌 곳이기도 하다. 흉노제국 이래 거란, 여진과 몽골제국 등이 한결같이 만주가 주는 혜택을 모태로 세계사에 걸출한 대제국으로 부상했다.
몽골제국시대 만주의 지배자는 칭기스칸의 말제 가문인 옷치긴 왕가이다. 옷치긴 왕가는 만주가 주는 경제적?군사적 풍요로움을 배경으로 몽?원제국사의 흐름 대세에 적지 않은 격랑과 격변을 초래케 했다. 특히, 대다수의 황금씨족이 아릭부케를 지지하는 상황에서 쿠빌라이가 몽골제국의 대칸으로 즉위하는 이변은 옷치긴 왕가가 주도했기에 가능했다. 또한 옷치긴 왕가의 계승자 나얀이 분권세력의 대표로써 중앙집권적 지배에 반기를 들고 일어나, 동?서제왕의 군사력을 결집시켜 대칸이 되려했던 것 역시 만주라는 이점이 크게 작용한 결과물이다.
이렇게 만주라는 배경을 향유했던 옷치긴 왕가는 때때로 체제 전복적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대칸이 되려고 쿠데타 기도를 감행했을 뿐만 아니라 반란 이후에도 여전히 자신들의 울루스를 독자적으로 경영할 만큼 끝내 실세로 엄존했다. 1315년에 옷치긴 왕가의 톡타는 요왕遼王의 일자왕호를 하사 받은 뒤, 1328년에 양도내전을 주도해 태정제의 아들 아리기바를 대칸으로 옹립했다. 양도내전에서 실패한 후에도 옷치긴 왕가의 야나스리가 요왕이 되어 울루스를 계속 통치했다. 더욱이 원 멸망 후에도 옷치긴 왕가의 아자스리는 주원장과의 타협을 통해 만주지역의 지배자로 남아있을 정도로 옷치긴 왕가는 국가의 중앙권력이 제어할 수 없는 막강한 독립 역량을 끝내 보유하고 있었다.
이렇듯 옷치긴 왕가가 제국 내에서 정치적 위상을 높이고, 독립적으로 울루스를 지배했음을 파악하는 것은 조선과 만주제국 등 향후 역사적 전개와 관련해 결정적인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고 본다. 옷치긴 왕가가 다져 놓은 만주 기반은 조선과 200년 후의 후금을 배태시키는 토대로 작용하고 있다.
옷치긴 왕가와 고려
옷치긴 왕가는 고려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즉, 옷치긴 왕가가 몽?원 제국과 고려를 연결하는 중간지점에 위치하는 지정학적 특수성은, 여?몽 관계의 변화를 주도하기도 하고 양 세력의 유착 관계에 따라서 견제받기도 하는 미묘한 입장에 놓여 있었다. 옷치긴 왕가와 고려의 인연은 옷치긴이 칭기스칸을 대신해 몽골리아를 통치한 1219년에 시작되어, 1225년 저고여 살해사건 때까지 고려에게 옷치긴은 가혹한 수탈을 징구한 주체였다. 또한 고려의 원종元宗은 쿠빌라이와 강화를 체결하면서 옷치긴 왕가의 수탈을 막아달라는 요청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쿠빌라이 정권 탄생의 일등 공신이었던 왕가의 타가차르는 오히려 고려의 서해도 일대까지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고 고려의 유민들이 옷치긴 왕가에 투탁할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고려에 행사했다.
쿠빌라이 카안에게 옷치긴 왕가는 자신을 즉위시킨 가장 강력한 우방인 동시에 두려움의 대상이 됐을 수도 있다. 결국 무섭게 확대되는 옷치긴 왕가의 세력을 제어하기 힘들었던 쿠빌라이는 충렬왕을 부마로 삼아 고려 국왕이 황금씨족 일원이 되게 함으로써 옷치긴 왕가와 세력 균형을 꾀하기도 했다. 이후 몽골의 대칸들은 충선왕忠宣王을 심왕瀋王으로 삼아 옷치긴 왕가의 남하를 방지하고 날로 확대되는 옷치긴 왕가를 고려와 분리해 견제하려 했다. 또한 충렬왕 이래 지속적인 통혼을 통해 대원제국은 고려의 내정 깊숙이 간섭해 실질적인 통제를 실시했고, 고려왕들은 쿠빌라이 카안의 부마로써 실추된 국왕의 권위나 정치적 지위를 확고히 할 수 있었다. 아울러 고려왕은 통혼을 통해 자동적으로 황금씨족의 일원이 되었기 때문에 대원제국 정치 중심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옷치긴 왕가라는 세력이 고려에 미친 영향은 몽골과 고려의 새로운 관계 정립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옷치긴 왕가와 이성계
무엇보다 옷치긴 왕가의 통치지역에서 기반을 확충하고 세력을 강화시킨 이들은 이성계 가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성계李成桂 가문과 옷치긴 왕가는 직간접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더 나아가 조선왕조의 건국 역시 옷치긴 왕가와의 관계 속에서 이해해 볼 수 있다. 우선 이성계의 고조부 이안사李安社는 옷치긴 왕가로부터 1255년에 남경南京 등지를 지배하던 천호장 겸 다루가치의 직위를 하사 받아서 이 일대를 세력기반으로 삼았다. 이후 이성계 가문은 천호장 겸 다루가치의 지위를 세습하여, 고려인과 여진인 등을 지배했기 때문에 옷치긴 왕가와 깊은 관계를 가진 세력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몽골의 전투방식과 산악전 모두 익숙했던 이성계는 한반도 내의 전투에만 익숙했던 당시의 다른 고려 장수들의 군사집단보다 더욱 강한 군사력을 발휘할 수 있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그 후 고려 말 최고의 실력자로 대두할 수 있었다.
한편, 원 멸망 후에, 어느 일국이 주도권을 잡지 못하고 고려?북원?명이 팽팽한 균형관계를 형성했던 14세기 말 동아시아 정세는 요동지역 군벌 출신인 나가추의 투항으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고려는 나가추라는 완충지대를 상실해서 명의 군사적 위협에 직접 노출됐으며, 최영을 중심으로 하는 무인세력들은 명의 철령위 설치에 반발해 요동을 정벌하려했다. 그러나 권문세족 출신인 최영과는 계급적 이해관계가 서로 달랐던 이성계는 최영의 요동정벌에 흔쾌히 동참키 어려웠다. 뿐만 아니라 이성계는 1387년 나가추 항복 이후 1388년 4월의 토구스 테무르칸 북원정권의 궤멸 소식과 몽골 지배계층의 투항 도미노 등으로 소멸해가는 북원의 실상을 꿰뚫어 보고, 1388년 5월에 마침내 위화도 회군을 결행했다. 따라서 1388년 5월의 위화도 회군은 옷치긴 왕가와 직간접으로 연결되어 몽골 내부사정을 잘 아는 이성계가 그 직전 북원의 기본 무력이 무너졌음을 파악한 데서 나온 14세기 말 동아시아 국제정치 상황의 결과물로 보아야 한다.
1392년 7월 이성계의 조선조 창업 역시 명의 대對옷치긴왕가 관계 정립과정의 일환으로 상호 조정된 일련의 동북아 신질서 형성과정의 소산이라 할 수도 있다. 즉, 원 멸망 후 1388년에 옷치긴 왕가는 영지 존립의 위기 상황 하에서 주원장에게 투항함으로서 다시 독립적 지배권을 유지하게 되었다. 옷치긴 왕가의 요왕 아자스리는 태녕위지휘사泰寧衛指揮使에 임명돼 명明정권과 비록 ‘책봉과 조공’이란 전통적 중화질서 속에 편입되기는 했으나 오히려 명조의 정치적 취약성과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일련의 약점 등을 이용해 더욱 강고한 울루스의 독립성을 확보함으로써 조선조의 창업과 200여년 후에 만주족의 청제국 탄생으로 연결되고 있다.
목차
|서론| 이젠는 만주사다
제1장 옷치긴 왕가, 만주를 분봉받다
칭기스칸, 제국을 나누다
동·서 분봉지의 총체적 원형
만주의 지배자, 옷치긴 왕가
옷치긴 왕가의 통치구조
제2장 옷치긴, 황금씨족의 중심이 되다
옷치긴이라는 자
운명을 건 도전, 금나라와의 전쟁
옷치긴의 요동 공략
칭기스칸의 금나라 정벌
우구데이 카안 시대의 옷치긴
옷치긴의 도전
제3장 옷치긴 왕가, 권력의 정점에 서다
우구데이 왕가에서 톨루이 왕가로, 뭉케의 즉위
타가차르, 상양부에서 퇴각하다
쿠빌라이를 대칸으로 만들다
제4장 반란들
중앙집권과 분권의 충돌
나얀 반란
양도내전
스러진 야망
제5장 제국의 해체와 격동의 14세기 말 동아시아
이성계 가문과 옷치긴 왕가
고려·북원·명의 삼각구도
북원의 멸망과 위화도 회군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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