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행본
국제무역의 정치경제와 법: 자유무역 이상과 중상주의 편향 사이에서
- 저자
- 구민교
- 판사항
- 개정판
- 발행사항
- 서울 : 박영사, 2021
- 형태사항
- xxvi, p.523 : 삽화, 도표 ; 26 cm
- 서지주기
- 참고문헌과 색인수록 (p.493-523)
소장정보
위치 | 등록번호 | 청구기호 / 출력 | 상태 | 반납예정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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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실 | E207637 | 대출가능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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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번호
- E207637
- 상태/반납예정일
- 대출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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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치/청구기호(출력)
- 자료실
책 소개
개 정 판 서 문
1999년 출판된 『무역정치경제론』이 20년 만에 『국제무역의 정치경제와 법』으로 거듭난 지 만 2년이 흘렀다. 그간 새 책으로 매 학기 학생들과 수업을 하면서 가장 많이 든 생각은 어떻게 하면 중상주의의 편향성을 낱낱이 밝히고 자유무역과의 ‘인지적’ 균형을 이루게 할 것인가였다. 중상주의를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대략 ‘수출은 선한 것, 수입은 악한 것’이라는 인식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시장이나 사회의 상대 개념으로서의) ‘국가’ 중심적 사고체계를 말한다. 학부생과 대학원생을 막론하고 자유무역을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마음으로까지 이해하지는 못했다. 학교 울타리 밖으로 나갈수록 중상주의 편향성은 더 강해졌다.
중상주의는 무엇보다 우리의 두려움을 먹고 산다. 누구나 무역이 필요하고 중요하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그래서 자유무역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무역이 야기하는 두려움, 예를 들면 ‘식량안보’나 ‘전략물자’라는 말 앞에서는 마음이 보호무역으로 가기 마련이다.
중상주의는 우리의 자기 보호본능을 자극한다. ‘나’와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는 반드시 ‘남’이 필요하지만, 그 ‘남’은 자기 자신이 살기 위해 언제든지 등을 돌릴 수 있기 때문에 늘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 자급자족이 경제적으로는 능사가 아니지만 정치적으로는 언제나 매력적인 대안이다.
중상주의는 마치 중력과도 같다. 잡아당기는 힘이 여간 강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움직이고 활동한다는 것은 그 힘을 이기는 과정이다. 중력에 매여 움직이지 못하면 살 수가 없다. 때로는 쓰러지고 주저앉기도 했지만, 인류의 역사는 곧 중력을 극복해 온 역사였다. 그렇다고 자유무역의 이상만을 좇아 땅에 발을 딛지 않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중상주의 관념을 없앨 수도 없고 없애서도 안 된다. 다만 지나침이 없도록 적절히 관리해야 하고, 자전거 페달을 계속 밟아야 쓰러지지 않듯이 자유무역을 위한 의도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지난 2년을 돌이켜 보면 무역을 둘러싼, ‘두려움’, ‘보호본능’, ‘중력의 법칙’이 더욱 강화되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특징은 무역과 안보 이슈의 연계가 두드러졌다는 점이다. 예기치 못했던 코로나-19의 확산은 가뜩이나 어려운 국제무역 환경에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팬데믹은 비대면 디지털 무역의 시대를 앞당기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먼저, 극적인 등장만큼이나 변칙적인 퇴장을 한 트럼프 대통령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 하지만 그의 ‘미국 우선주의’의 후유증은 당분간 계속될 것이다. 이제 막 임기를 시작한 바이든 행정부가 대부분의 정책 분야에서 ‘탈(脫) 트럼프’를 선언했지만 미국의 이익에 가장 큰 위협으로 여겨지는 중국에 대한 공세 기조만큼은 그대로 유지할 전망이다. 특히 중국의 첨단산업에 대한 무역제재가 미중 간 ‘기술패권경쟁’ 속에서 나온 것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심지어는 (가장 중상주의적 사고를 갖고 온갖 논란이 되는 조치를 시행하고 있는) 중국 시진핑 주석이 나서서 “일방주의, 보호주의, 극단적 이기주의나 협박, 봉쇄, 극한의 압력 행사 같은 방법은 통하지 않을 뿐더러 반드시 죽음의 길로 이어질 것”이라며 미국의 무역-안보 연계 전략에 강하게 반발할 정도다.
2019년 돌발한 일본의 핵심부품 수출규제 조치도 같은 맥락이다. 일본은 동 규제 조치가 ‘안보’ 문제이며, 따라서 국제 규범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물론 동 조치가 2018년 한국 대법원의 징용노동자 판결에 대한 보복이라는 점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동시에 반도체 분야에서 오히려 한국에 대한 의존성이 높아지는 것에 대한 일본의 조바심도 엿보인다. 기술패권경쟁의 한일 버전인 셈이다. 한국 정부가 ‘소부장(소재, 부품, 장비)’ 정책을 통해 자급자족을 추진하고 산업통상자원부 내에 ‘무역안보정책관(국장급)’을 신설해 무역안보 기능을 강화하겠다고 나선 것도 우연이 아니다.
무역이 국가 간 갈등의 단골 메뉴인 이유는 국제사회에서 무역의 중요성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사태는 전통적 안보 이슈뿐만 바이러스와 백신과 같은 비전통 안보 이슈도 무역과 연계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아직은 초기 단계이지만 ‘백신패권경쟁’으로 비화될 조짐도 보인다. 이 책에서 누누이 강조하듯이 무역 의존성과 그에 따른 상대적 이득의 배분은 국가 간 권력관계를 만든다.
한편, 국제무역의 새로운 기회도 열리고 있다. 온라인 쇼핑, 소셜 미디어, 비대면 회의, 비디오와 영화 스트리밍이 증가함에 따라 기업 대 소비자(B2C) 거래가 급증하고, 기업 대 기업(B2B) 전자상거래도 크게 늘었다. 해외직구가 더 이상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그다지 유쾌한 상상은 아니지만, 디지털 시대가 채 열리지 않은 상황에서 코로나-19와 같은 글로벌 팬데믹이 닥쳤다면 우리의 삶은 어땠을까?
물론 디지털 무역이 늘 장밋빛인 것만은 아니다. 국가 안팎으로 정보격차, 디지털 격차를 메워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대내적으로는 사회적 약자, 대외적으로는 최빈개도국에게 디지털 무역은 새로운 기회이자 전대미문의 위기가 될 수 있다. 거대 디지털 다국적 기업의 독점, 부의 양극화, 인간이 기계에 종속당하는 디스토피아의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한 새로운 무역규범의 수립이 필요하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대한민국의 무역‧통상정책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첫째, 교역 상대국의 다양화와 다변화가 필요하다. 한국은 자신의 5대 교역국(중국, 아세안, 미국, EU, 일본)이 자신의 전체 무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70% 이상으로 너무 높다. 교역 상대국이 무역-안보 연계를 해오면 취약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특히 중국에 대한 무역의존도(홍콩 포함 약 27%)는 지속가능하지 않다. 제2, 제3의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사태 발생 가능성에 취약하다.
둘째, WTO를 중심으로 하는 다자주의 규범뿐만 아니라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 경제 동반자 협정(CPTPP)과 역내 포괄적 경제동반자 협정(RCEP)과 같이 메가 FTA로 불리는 복수국간 협정의 규범 형성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WTO의 도하라운드가 실질적으로 큰 성과 없이 끝난 이후 새로운 규범 확립 노력이 이들 메가 FTA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WTO 체제가 무력화된 것은 아니다. 많은 이들의 우려와는 달리 국제 교역량이 2020년 하반기부터 점차 회복세에 있다. 아직 긴 터널의 끝이 보이지는 않지만 20세기 중반 이후 뿌리를 내린 다자간 무역질서의 회복 탄력성을 보여준다. WTO 사무총장 선거에서 한국인 후보가 최종라운드까지 선전한 것도 소중한 경험이었다.
셋째, 안보와 디지털, 이 두 가지 키워드를 국내 통상정책 거버넌스에 어떻게 엮어낼 수 있을까? 현행 산업통상자원부/통상교섭본부 체제가 과연 최적일까? 논란의 여지는 있겠으나 지난 10년이 국제무역과 관련된 대내적 문제, 다시 말해 ‘통상정책의 민주화’에 천착한 시기였다면, 이제는 다시 대외적 불확실성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이번 개정 작업에서는 여러 ‘팩트체크’뿐만 아니라 앞서 언급한 주요 트렌드를 책의 곳곳에 담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이번에도 저자의 조교들이 애를 많이 써주었다. 한정현, 차유진, 유수진, 이가은, 이채현, 정은지 등 현직 조교뿐만 아니라 미국 유학 중인 박려경, 정예준 등 전직 조교도 자료 정리에 온갖 정성을 다했다. 장아름 박사도 미국에서 학위를 받고 귀국하자마자 크고 작은 기여를 해주었다. 지난 2년간 통상정책론 수업에 참여해 적극적인 피드백을 해 준 행정대학원 학생들과 주제탐구세미나에 참여한 자유전공학부 학생들에게도 이 자리를 빌려 고마움을 전한다.
한 자라도 더 고치고 더하느라 개정판 원고를 너무 늦게 완성했는데도 저자의 까다로운 요구를 끝까지 들어준 박영사의 조성호 이사, 이영조 팀장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정성스레 표지를 도안해 준 박현정 씨에게도 감사드린다. 촉박한 일정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솜씨로 편집과 교정을 맡아준 황정원 편집자께도 감사드린다.
끝으로 이 개정판에 큰 변화가 있다. 저자의 은사님이신 최병선 교수님께서 제자에게 더 큰 책임감을 부여한다는 뜻에서 이 책에서 하차하시기로 한 것이다. 지난 25년 동안 ‘거인’의 어깨 위에서 통상정책을 바라보다가 하루아침에 땅 위에 홀로 선 듯한 느낌이다. 고되지만 지적으로 즐거운 시간을 허락해 주신 최 교수님의 격려와 사랑에 조금이나마 보답하기 위해 앞으로 더 좋은 책을 만드는 수밖에 없다. 그런 마음으로 매진해 온 지난 2년 동안 한결같은 응원을 해 준 아내 은희와 삼남매 윤지, 수지, 준우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2021년 1월
관악 캠퍼스에서
구 민 교
서 문
감자나 고구마를 캐본 사람은 안다. 굵은 뿌리, 잔뿌리 다칠세라 조심스레 흙을 파내려가다 손에 잡히는 토실토실한 감자, 고구마를 캐며 느꼈던 재미와 감격을. 최병선이 그랬다. 고시 합격 후 별다른 전문지식 없이 (그러니 겁도 없이) 정부부처에서 무역정책 업무를 맡았다가 자신의 무식함을 처절히 깨닫던 중 우여곡절 끝에 오른 미국 유학길. 그제야 국제무역 분야의 연구가 산더미처럼 쌓이다 못해 큰 산맥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버드 케네디스쿨에서 공부하는 동안 무역정책은 유난히도 그의 흥미를 유발했고, 좋은 논문을 읽고 강의를 들을 때마다 그는 지적 흥분에 휩싸이곤 했다. 이런 지적인 자극이 아니었다면 당시로선 전도유망한 공직생활을 접고 불확실성으로 가득 찬 학문의 길로 들어서지 않았을 것이다.
박사학위를 마치고 운 좋게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 자리를 잡은 최병선은 1988년 첫 학기에 국내 최초로 행정학과에서 통상정책 강의를 개설했다. 정치경제학 관점에서 무역정책을 체계적으로 다룬 교과서가 국내에 전무했던 터라 학생들이 전모를 파악하지 못해 애를 먹는 것을 본 최병선은 유학시절부터 모아놓은 방대한 양의 책과 논문을 다시 읽으며 집필을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진행 중이던 우루과이라운드 협상 타결이 계속 천연되어 국제무역규범이 어떻게 변화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고, 1992년 『정부규제론』 출판 이후 규제개혁 전문가로 행세하느라 그의 무역정책론 집필은 마냥 더디어졌다.
오랜 진통 끝에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가 출범하자 최병선에게 무역정책론 집필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가 되었다. 그의 문제의식은 분명했다. 한국의 중상주의적 무역정책은 더 이상 시대의 요청에 부합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중상주의적 편견이 지배한 개발연대에 한국의 무역정책과 그 결정과정은 극도로 생산자 편향을 보였다. WTO가 출범하고 새로운 무역규범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시점이었는데도 관련 산업과 소비자의 이익을 도외시한 생산자 중심의 무역정책은 요지부동이었다. 중상주의 편향이 조장해 온 구조적 비효율성, 부조리, 불공평을 과감하게 걷어내지 않고서는 대한민국이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어렵다는 신념 아래 그는 집필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글을 쓰다 부딪친 질문에 답하지 않고서는 단 한 줄도 넘어가지 못하는 성미 탓에 집필은 마냥 지체되었다. 쓰다가 읽고, 읽다가 쓰기를 반복한 끝에 새천년 직전인 1999년이 되어서야 『무역정치경제론』이 출판되었다. 의욕이 지나쳤던 탓일까? 그만 1,000쪽이 넘는 가공할 분량의 책이 되어버렸다. 감자와 고구마를 캘 때와 같은 재미와 흥분 속에 최병선 자신은 지적 호기심을 제대로 채웠지만 그토록 두꺼운 책을 반기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나름의 사명감을 갖고 쓴 책이 독자들의 외면을 받자 그의 마음에도 상처가 났다. 이런 책은 전무후무할 것이라는 그의 꺾인 자존심만 남았다.
최병선에게 구민교는 구원투수였다. 이 두 사람은 1995년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사제지간으로 처음 만났다. 2년간 무역정책론 집필을 거들다 유학을 간 구민교가 UC 버클리에서 학위를 마치고 포닥 생활을 한 후 10년 만에 다시 귀국했을 때 최병선은 이미 규제정책 쪽으로 애정과 관심을 돌려버린 뒤였다. 무역으로 먹고 사는 나라의 고위관료가 되겠다면서도 무역정책 공부는 요리조리 피하던 행정대학원 학생들에 대한 실망, 잔뜩 공을 들인 역작을 매정하게 외면한 독자들에 대한 서운함 때문이었다. 그런 스승의 마음을 알았던 제자는 스승이 묻기도 전에 책 개정을 도맡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남이 쓴 책을 고쳐 쓴다는 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이겠는가. 구민교의 개정작업 역시 시작부터 난항에 빠졌다. 그 사이 구민교가 모교로 자리를 옮겨 최병선의 지근거리에 있게 되었지만 사정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구민교는 출판사로부터 책의 분량을 절반 이하로 줄여달라는 간곡한 주문을 받고 있었던 터라 1,000쪽이 넘는 스승의 책에 ‘칼질’을 할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그간의 새로운 내용을 추가해야 했다. ‘원적문제(圓積問題, Squaring the circle)’, 즉 원과 같은 면적을 가진 정사각형을 자와 컴퍼스만으로 작도하는 문제처럼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었다.
구민교가 이 난제를 풀고 개정판 아닌 개정판인 이 책을 내기까지 꼬박 11년이 걸렸다. 이 책의 뼈대는 『무역정치경제론』이지만 내용을 압축해 재배열하고 새로운 내용을 추가하는 과정에서 책 전체를 다시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엇보다 무역정책에 관심이 있는 일반 독자도 쉽게 또는 약간의 노력만으로 따라올 수 있는 책을 만들기 위해 애썼다. 원저의 출간 후 시간이 흐르는 동안 어색해진 표현들도 모두 고쳤다. 전작의 방대한 각주 서술은 꼭 필요한 것들만 남겼다. 그 사이 정년퇴임을 한 최병선은 식은 애정을 돌이켜 제자가 고쳐 쓴 원고를 읽고 수정하는 기쁨을 누렸다. 학문의 결이 매우 비슷하면서도 최병선의 원전에 난도질을 가한 구민교의 글에 최병선이 다시 예리한 흔적을 남겼음은 물론이다.
정확히 20년 만에 절반의 분량으로 새롭게 태어난 이 책은 그간의 많은 국내외 변화를 잘 담아냈다고 자부한다. 무엇보다 한국은 이 기간에 통상국가(trading state)로 거듭났다. 2011년 한국은 전 세계에서 아홉 번째로 1조 달러 무역을 달성한 국가가 되었다. 1999년 2,636억 달러였던 총상품무역(수출액+수입액), 4,454억 달러였던 국내총생산(GDP)은 2018년 현재 4배가량 증가했다. 같은 기간 전 세계 총상품무역이 3배가량, 전 세계 GDP가 약 2.5배가량 증가한 것에 비해 매우 빠른 속도이다. 1960년대 이후 과감하게 수출지향 산업화 정책을 편 이후 3저 호황기였던 1986-88년을 제외하고 1990년대 후반까지 줄곧 만성적 무역적자에 시달리던 한국은, 역설적으로 외환위기를 겪은 1998년 이후 (글로벌 경제위기를 겪었던 2008년을 제외하고) 상품무역 흑자를 이어가고 있다. 2017년에만 950억 달러(약 100조 원)의 흑자를 기록했고, 지난 20년간의 누적흑자는 7,300억 달러(약 810조 원)에 달한다. 전 세계적으로 흔치 않은 무역입국(貿易立國)의 성공 사례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런 놀라운 양적 성장의 이면, 즉 경쟁적인 수출부문과 비경쟁적인 수입경쟁 산업이라는 서로 다르지만 연관된 두 영역이 만들어내는 무역정치경제의 본질적 속성은 바뀌지 않았다. 이 책이 강조하는 바와 같이 무역자유화는 국내적으로 승자와 패자를 만들어내는 대단히 복잡한 정치경제 현상이다. 반도체, 자동차, 선박, 섬유와 같이 국제경쟁력을 갖춘 부문에서의 자유무역은 국내적으로 쉽게 받아들여지지만, 농업과 일부 제조업 및 서비스업과 같이 국제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부문의 시장개방은 거센 반발에 가로막혀 있다.
한편, 국제무역질서와 환경이 크게 바뀌었다. 변화의 가장 큰 원인은 역시 중국이다. 중국의 등장으로 경쟁이 심화되고 보호무역주의 장벽이 높아졌다. 기존의 WTO 체제의 법적․제도적 한계도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국제무역질서에 새로운 규범과 기준을 주도하려는 미국, 유럽연합(European Union), 일본, 중국은 물론 인도, 브라질, 러시아 등 신흥거대경제국 간의 경쟁도 유례없이 심화되고 있다. 중견국인 한국이 지금까지의 성공에 안주할 수 없는 이유이다. 2019년 현재 상황은 1999년의 데자뷰(déjà vu)이다.
구민교의 조교들은 이 책의 숨은 공로자들이다. 한정현, 박유라, 박려경, 서혜빈, 정예준, 차유진 등 조교들은 자료 정리에서부터 오탈자 교정에 이르기까지 온갖 정성을 다했다. 이미 졸업해 사회인이 되거나 유학 중인 김인오, 장아름, 장윤정, 서단비, 이단비, 박정연, 김현범, 오유정, 도타 다카시 등도 이 책의 집필과정에서 크고 작은 기여를 한 고마운 조교들이다. 최병선의 뒤를 이어 지난 2년 간 구민교가 강의한 통상정책론 수업에 참여해 적극적인 피드백을 해준 행정대학원 학생들, 특히 주영준과 박정민은 기억에 남는 제자들이다. 구민교의 대학 동기이자 학문적 동반자인 뉴욕시립대 강명구 교수는 원고의 전체를 꼼꼼하게 읽고 귀한 논평을 해주었다. 서울대학교 윤영관, 강태진, 김화진, 안덕근, 이재민 교수, 연세대학교 손열 교수, UC 버클리의 비노드 아가왈(Vinod K. Aggarwal) 및 티제이 펨펠(T.J. Pempel) 교수, 그리고 2017년 작고하신 이홍영 교수로부터 각기 다른 인연과 계기로 많은 도움을 받았다.
1999년 당시 『무역정치경제론』의 출판에 기여했던 박영사의 조성호 이사의 새로운 노고에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지난 수년간 변치 않았던 손준호 과장의 인내심과 무던함에도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정성스레 표지를 도안해 준 박현정 씨에게도 감사드린다. 촉박한 일정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솜씨로 편집과 교정을 맡아준 마찬옥 편집위원께도 감사드린다.
끝으로 이번 집필 과정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격려를 해 준 구민교의 부모님, 동생 희연과 홍교, 그리고 아내 은희와 삼남매 윤지, 수지, 준우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최병선의 두 외손자인 정재헌과 재하, 그리고 구민교의 삼남매가 장성한 뒤 읽더라도 여전히 유익한 책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지나친 욕심일 수 있겠지만 이 책이 전달하려고 한 핵심 메시지는 살아남을 것으로 믿는다. 그리고 20년 뒤에는 어떤 구원투수가 다시 나와 바통을 이어갈지 궁금해진다.
2019년 1월
관악 캠퍼스에서
최병선․구민교
1999년 출판된 『무역정치경제론』이 20년 만에 『국제무역의 정치경제와 법』으로 거듭난 지 만 2년이 흘렀다. 그간 새 책으로 매 학기 학생들과 수업을 하면서 가장 많이 든 생각은 어떻게 하면 중상주의의 편향성을 낱낱이 밝히고 자유무역과의 ‘인지적’ 균형을 이루게 할 것인가였다. 중상주의를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대략 ‘수출은 선한 것, 수입은 악한 것’이라는 인식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시장이나 사회의 상대 개념으로서의) ‘국가’ 중심적 사고체계를 말한다. 학부생과 대학원생을 막론하고 자유무역을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마음으로까지 이해하지는 못했다. 학교 울타리 밖으로 나갈수록 중상주의 편향성은 더 강해졌다.
중상주의는 무엇보다 우리의 두려움을 먹고 산다. 누구나 무역이 필요하고 중요하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그래서 자유무역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무역이 야기하는 두려움, 예를 들면 ‘식량안보’나 ‘전략물자’라는 말 앞에서는 마음이 보호무역으로 가기 마련이다.
중상주의는 우리의 자기 보호본능을 자극한다. ‘나’와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는 반드시 ‘남’이 필요하지만, 그 ‘남’은 자기 자신이 살기 위해 언제든지 등을 돌릴 수 있기 때문에 늘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 자급자족이 경제적으로는 능사가 아니지만 정치적으로는 언제나 매력적인 대안이다.
중상주의는 마치 중력과도 같다. 잡아당기는 힘이 여간 강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움직이고 활동한다는 것은 그 힘을 이기는 과정이다. 중력에 매여 움직이지 못하면 살 수가 없다. 때로는 쓰러지고 주저앉기도 했지만, 인류의 역사는 곧 중력을 극복해 온 역사였다. 그렇다고 자유무역의 이상만을 좇아 땅에 발을 딛지 않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중상주의 관념을 없앨 수도 없고 없애서도 안 된다. 다만 지나침이 없도록 적절히 관리해야 하고, 자전거 페달을 계속 밟아야 쓰러지지 않듯이 자유무역을 위한 의도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지난 2년을 돌이켜 보면 무역을 둘러싼, ‘두려움’, ‘보호본능’, ‘중력의 법칙’이 더욱 강화되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특징은 무역과 안보 이슈의 연계가 두드러졌다는 점이다. 예기치 못했던 코로나-19의 확산은 가뜩이나 어려운 국제무역 환경에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팬데믹은 비대면 디지털 무역의 시대를 앞당기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먼저, 극적인 등장만큼이나 변칙적인 퇴장을 한 트럼프 대통령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 하지만 그의 ‘미국 우선주의’의 후유증은 당분간 계속될 것이다. 이제 막 임기를 시작한 바이든 행정부가 대부분의 정책 분야에서 ‘탈(脫) 트럼프’를 선언했지만 미국의 이익에 가장 큰 위협으로 여겨지는 중국에 대한 공세 기조만큼은 그대로 유지할 전망이다. 특히 중국의 첨단산업에 대한 무역제재가 미중 간 ‘기술패권경쟁’ 속에서 나온 것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심지어는 (가장 중상주의적 사고를 갖고 온갖 논란이 되는 조치를 시행하고 있는) 중국 시진핑 주석이 나서서 “일방주의, 보호주의, 극단적 이기주의나 협박, 봉쇄, 극한의 압력 행사 같은 방법은 통하지 않을 뿐더러 반드시 죽음의 길로 이어질 것”이라며 미국의 무역-안보 연계 전략에 강하게 반발할 정도다.
2019년 돌발한 일본의 핵심부품 수출규제 조치도 같은 맥락이다. 일본은 동 규제 조치가 ‘안보’ 문제이며, 따라서 국제 규범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물론 동 조치가 2018년 한국 대법원의 징용노동자 판결에 대한 보복이라는 점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동시에 반도체 분야에서 오히려 한국에 대한 의존성이 높아지는 것에 대한 일본의 조바심도 엿보인다. 기술패권경쟁의 한일 버전인 셈이다. 한국 정부가 ‘소부장(소재, 부품, 장비)’ 정책을 통해 자급자족을 추진하고 산업통상자원부 내에 ‘무역안보정책관(국장급)’을 신설해 무역안보 기능을 강화하겠다고 나선 것도 우연이 아니다.
무역이 국가 간 갈등의 단골 메뉴인 이유는 국제사회에서 무역의 중요성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사태는 전통적 안보 이슈뿐만 바이러스와 백신과 같은 비전통 안보 이슈도 무역과 연계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아직은 초기 단계이지만 ‘백신패권경쟁’으로 비화될 조짐도 보인다. 이 책에서 누누이 강조하듯이 무역 의존성과 그에 따른 상대적 이득의 배분은 국가 간 권력관계를 만든다.
한편, 국제무역의 새로운 기회도 열리고 있다. 온라인 쇼핑, 소셜 미디어, 비대면 회의, 비디오와 영화 스트리밍이 증가함에 따라 기업 대 소비자(B2C) 거래가 급증하고, 기업 대 기업(B2B) 전자상거래도 크게 늘었다. 해외직구가 더 이상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그다지 유쾌한 상상은 아니지만, 디지털 시대가 채 열리지 않은 상황에서 코로나-19와 같은 글로벌 팬데믹이 닥쳤다면 우리의 삶은 어땠을까?
물론 디지털 무역이 늘 장밋빛인 것만은 아니다. 국가 안팎으로 정보격차, 디지털 격차를 메워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대내적으로는 사회적 약자, 대외적으로는 최빈개도국에게 디지털 무역은 새로운 기회이자 전대미문의 위기가 될 수 있다. 거대 디지털 다국적 기업의 독점, 부의 양극화, 인간이 기계에 종속당하는 디스토피아의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한 새로운 무역규범의 수립이 필요하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대한민국의 무역‧통상정책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첫째, 교역 상대국의 다양화와 다변화가 필요하다. 한국은 자신의 5대 교역국(중국, 아세안, 미국, EU, 일본)이 자신의 전체 무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70% 이상으로 너무 높다. 교역 상대국이 무역-안보 연계를 해오면 취약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특히 중국에 대한 무역의존도(홍콩 포함 약 27%)는 지속가능하지 않다. 제2, 제3의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사태 발생 가능성에 취약하다.
둘째, WTO를 중심으로 하는 다자주의 규범뿐만 아니라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 경제 동반자 협정(CPTPP)과 역내 포괄적 경제동반자 협정(RCEP)과 같이 메가 FTA로 불리는 복수국간 협정의 규범 형성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WTO의 도하라운드가 실질적으로 큰 성과 없이 끝난 이후 새로운 규범 확립 노력이 이들 메가 FTA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WTO 체제가 무력화된 것은 아니다. 많은 이들의 우려와는 달리 국제 교역량이 2020년 하반기부터 점차 회복세에 있다. 아직 긴 터널의 끝이 보이지는 않지만 20세기 중반 이후 뿌리를 내린 다자간 무역질서의 회복 탄력성을 보여준다. WTO 사무총장 선거에서 한국인 후보가 최종라운드까지 선전한 것도 소중한 경험이었다.
셋째, 안보와 디지털, 이 두 가지 키워드를 국내 통상정책 거버넌스에 어떻게 엮어낼 수 있을까? 현행 산업통상자원부/통상교섭본부 체제가 과연 최적일까? 논란의 여지는 있겠으나 지난 10년이 국제무역과 관련된 대내적 문제, 다시 말해 ‘통상정책의 민주화’에 천착한 시기였다면, 이제는 다시 대외적 불확실성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이번 개정 작업에서는 여러 ‘팩트체크’뿐만 아니라 앞서 언급한 주요 트렌드를 책의 곳곳에 담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이번에도 저자의 조교들이 애를 많이 써주었다. 한정현, 차유진, 유수진, 이가은, 이채현, 정은지 등 현직 조교뿐만 아니라 미국 유학 중인 박려경, 정예준 등 전직 조교도 자료 정리에 온갖 정성을 다했다. 장아름 박사도 미국에서 학위를 받고 귀국하자마자 크고 작은 기여를 해주었다. 지난 2년간 통상정책론 수업에 참여해 적극적인 피드백을 해 준 행정대학원 학생들과 주제탐구세미나에 참여한 자유전공학부 학생들에게도 이 자리를 빌려 고마움을 전한다.
한 자라도 더 고치고 더하느라 개정판 원고를 너무 늦게 완성했는데도 저자의 까다로운 요구를 끝까지 들어준 박영사의 조성호 이사, 이영조 팀장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정성스레 표지를 도안해 준 박현정 씨에게도 감사드린다. 촉박한 일정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솜씨로 편집과 교정을 맡아준 황정원 편집자께도 감사드린다.
끝으로 이 개정판에 큰 변화가 있다. 저자의 은사님이신 최병선 교수님께서 제자에게 더 큰 책임감을 부여한다는 뜻에서 이 책에서 하차하시기로 한 것이다. 지난 25년 동안 ‘거인’의 어깨 위에서 통상정책을 바라보다가 하루아침에 땅 위에 홀로 선 듯한 느낌이다. 고되지만 지적으로 즐거운 시간을 허락해 주신 최 교수님의 격려와 사랑에 조금이나마 보답하기 위해 앞으로 더 좋은 책을 만드는 수밖에 없다. 그런 마음으로 매진해 온 지난 2년 동안 한결같은 응원을 해 준 아내 은희와 삼남매 윤지, 수지, 준우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2021년 1월
관악 캠퍼스에서
구 민 교
서 문
감자나 고구마를 캐본 사람은 안다. 굵은 뿌리, 잔뿌리 다칠세라 조심스레 흙을 파내려가다 손에 잡히는 토실토실한 감자, 고구마를 캐며 느꼈던 재미와 감격을. 최병선이 그랬다. 고시 합격 후 별다른 전문지식 없이 (그러니 겁도 없이) 정부부처에서 무역정책 업무를 맡았다가 자신의 무식함을 처절히 깨닫던 중 우여곡절 끝에 오른 미국 유학길. 그제야 국제무역 분야의 연구가 산더미처럼 쌓이다 못해 큰 산맥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버드 케네디스쿨에서 공부하는 동안 무역정책은 유난히도 그의 흥미를 유발했고, 좋은 논문을 읽고 강의를 들을 때마다 그는 지적 흥분에 휩싸이곤 했다. 이런 지적인 자극이 아니었다면 당시로선 전도유망한 공직생활을 접고 불확실성으로 가득 찬 학문의 길로 들어서지 않았을 것이다.
박사학위를 마치고 운 좋게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 자리를 잡은 최병선은 1988년 첫 학기에 국내 최초로 행정학과에서 통상정책 강의를 개설했다. 정치경제학 관점에서 무역정책을 체계적으로 다룬 교과서가 국내에 전무했던 터라 학생들이 전모를 파악하지 못해 애를 먹는 것을 본 최병선은 유학시절부터 모아놓은 방대한 양의 책과 논문을 다시 읽으며 집필을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진행 중이던 우루과이라운드 협상 타결이 계속 천연되어 국제무역규범이 어떻게 변화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고, 1992년 『정부규제론』 출판 이후 규제개혁 전문가로 행세하느라 그의 무역정책론 집필은 마냥 더디어졌다.
오랜 진통 끝에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가 출범하자 최병선에게 무역정책론 집필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가 되었다. 그의 문제의식은 분명했다. 한국의 중상주의적 무역정책은 더 이상 시대의 요청에 부합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중상주의적 편견이 지배한 개발연대에 한국의 무역정책과 그 결정과정은 극도로 생산자 편향을 보였다. WTO가 출범하고 새로운 무역규범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시점이었는데도 관련 산업과 소비자의 이익을 도외시한 생산자 중심의 무역정책은 요지부동이었다. 중상주의 편향이 조장해 온 구조적 비효율성, 부조리, 불공평을 과감하게 걷어내지 않고서는 대한민국이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어렵다는 신념 아래 그는 집필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글을 쓰다 부딪친 질문에 답하지 않고서는 단 한 줄도 넘어가지 못하는 성미 탓에 집필은 마냥 지체되었다. 쓰다가 읽고, 읽다가 쓰기를 반복한 끝에 새천년 직전인 1999년이 되어서야 『무역정치경제론』이 출판되었다. 의욕이 지나쳤던 탓일까? 그만 1,000쪽이 넘는 가공할 분량의 책이 되어버렸다. 감자와 고구마를 캘 때와 같은 재미와 흥분 속에 최병선 자신은 지적 호기심을 제대로 채웠지만 그토록 두꺼운 책을 반기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나름의 사명감을 갖고 쓴 책이 독자들의 외면을 받자 그의 마음에도 상처가 났다. 이런 책은 전무후무할 것이라는 그의 꺾인 자존심만 남았다.
최병선에게 구민교는 구원투수였다. 이 두 사람은 1995년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사제지간으로 처음 만났다. 2년간 무역정책론 집필을 거들다 유학을 간 구민교가 UC 버클리에서 학위를 마치고 포닥 생활을 한 후 10년 만에 다시 귀국했을 때 최병선은 이미 규제정책 쪽으로 애정과 관심을 돌려버린 뒤였다. 무역으로 먹고 사는 나라의 고위관료가 되겠다면서도 무역정책 공부는 요리조리 피하던 행정대학원 학생들에 대한 실망, 잔뜩 공을 들인 역작을 매정하게 외면한 독자들에 대한 서운함 때문이었다. 그런 스승의 마음을 알았던 제자는 스승이 묻기도 전에 책 개정을 도맡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남이 쓴 책을 고쳐 쓴다는 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이겠는가. 구민교의 개정작업 역시 시작부터 난항에 빠졌다. 그 사이 구민교가 모교로 자리를 옮겨 최병선의 지근거리에 있게 되었지만 사정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구민교는 출판사로부터 책의 분량을 절반 이하로 줄여달라는 간곡한 주문을 받고 있었던 터라 1,000쪽이 넘는 스승의 책에 ‘칼질’을 할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그간의 새로운 내용을 추가해야 했다. ‘원적문제(圓積問題, Squaring the circle)’, 즉 원과 같은 면적을 가진 정사각형을 자와 컴퍼스만으로 작도하는 문제처럼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었다.
구민교가 이 난제를 풀고 개정판 아닌 개정판인 이 책을 내기까지 꼬박 11년이 걸렸다. 이 책의 뼈대는 『무역정치경제론』이지만 내용을 압축해 재배열하고 새로운 내용을 추가하는 과정에서 책 전체를 다시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엇보다 무역정책에 관심이 있는 일반 독자도 쉽게 또는 약간의 노력만으로 따라올 수 있는 책을 만들기 위해 애썼다. 원저의 출간 후 시간이 흐르는 동안 어색해진 표현들도 모두 고쳤다. 전작의 방대한 각주 서술은 꼭 필요한 것들만 남겼다. 그 사이 정년퇴임을 한 최병선은 식은 애정을 돌이켜 제자가 고쳐 쓴 원고를 읽고 수정하는 기쁨을 누렸다. 학문의 결이 매우 비슷하면서도 최병선의 원전에 난도질을 가한 구민교의 글에 최병선이 다시 예리한 흔적을 남겼음은 물론이다.
정확히 20년 만에 절반의 분량으로 새롭게 태어난 이 책은 그간의 많은 국내외 변화를 잘 담아냈다고 자부한다. 무엇보다 한국은 이 기간에 통상국가(trading state)로 거듭났다. 2011년 한국은 전 세계에서 아홉 번째로 1조 달러 무역을 달성한 국가가 되었다. 1999년 2,636억 달러였던 총상품무역(수출액+수입액), 4,454억 달러였던 국내총생산(GDP)은 2018년 현재 4배가량 증가했다. 같은 기간 전 세계 총상품무역이 3배가량, 전 세계 GDP가 약 2.5배가량 증가한 것에 비해 매우 빠른 속도이다. 1960년대 이후 과감하게 수출지향 산업화 정책을 편 이후 3저 호황기였던 1986-88년을 제외하고 1990년대 후반까지 줄곧 만성적 무역적자에 시달리던 한국은, 역설적으로 외환위기를 겪은 1998년 이후 (글로벌 경제위기를 겪었던 2008년을 제외하고) 상품무역 흑자를 이어가고 있다. 2017년에만 950억 달러(약 100조 원)의 흑자를 기록했고, 지난 20년간의 누적흑자는 7,300억 달러(약 810조 원)에 달한다. 전 세계적으로 흔치 않은 무역입국(貿易立國)의 성공 사례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런 놀라운 양적 성장의 이면, 즉 경쟁적인 수출부문과 비경쟁적인 수입경쟁 산업이라는 서로 다르지만 연관된 두 영역이 만들어내는 무역정치경제의 본질적 속성은 바뀌지 않았다. 이 책이 강조하는 바와 같이 무역자유화는 국내적으로 승자와 패자를 만들어내는 대단히 복잡한 정치경제 현상이다. 반도체, 자동차, 선박, 섬유와 같이 국제경쟁력을 갖춘 부문에서의 자유무역은 국내적으로 쉽게 받아들여지지만, 농업과 일부 제조업 및 서비스업과 같이 국제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부문의 시장개방은 거센 반발에 가로막혀 있다.
한편, 국제무역질서와 환경이 크게 바뀌었다. 변화의 가장 큰 원인은 역시 중국이다. 중국의 등장으로 경쟁이 심화되고 보호무역주의 장벽이 높아졌다. 기존의 WTO 체제의 법적․제도적 한계도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국제무역질서에 새로운 규범과 기준을 주도하려는 미국, 유럽연합(European Union), 일본, 중국은 물론 인도, 브라질, 러시아 등 신흥거대경제국 간의 경쟁도 유례없이 심화되고 있다. 중견국인 한국이 지금까지의 성공에 안주할 수 없는 이유이다. 2019년 현재 상황은 1999년의 데자뷰(déjà vu)이다.
구민교의 조교들은 이 책의 숨은 공로자들이다. 한정현, 박유라, 박려경, 서혜빈, 정예준, 차유진 등 조교들은 자료 정리에서부터 오탈자 교정에 이르기까지 온갖 정성을 다했다. 이미 졸업해 사회인이 되거나 유학 중인 김인오, 장아름, 장윤정, 서단비, 이단비, 박정연, 김현범, 오유정, 도타 다카시 등도 이 책의 집필과정에서 크고 작은 기여를 한 고마운 조교들이다. 최병선의 뒤를 이어 지난 2년 간 구민교가 강의한 통상정책론 수업에 참여해 적극적인 피드백을 해준 행정대학원 학생들, 특히 주영준과 박정민은 기억에 남는 제자들이다. 구민교의 대학 동기이자 학문적 동반자인 뉴욕시립대 강명구 교수는 원고의 전체를 꼼꼼하게 읽고 귀한 논평을 해주었다. 서울대학교 윤영관, 강태진, 김화진, 안덕근, 이재민 교수, 연세대학교 손열 교수, UC 버클리의 비노드 아가왈(Vinod K. Aggarwal) 및 티제이 펨펠(T.J. Pempel) 교수, 그리고 2017년 작고하신 이홍영 교수로부터 각기 다른 인연과 계기로 많은 도움을 받았다.
1999년 당시 『무역정치경제론』의 출판에 기여했던 박영사의 조성호 이사의 새로운 노고에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지난 수년간 변치 않았던 손준호 과장의 인내심과 무던함에도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정성스레 표지를 도안해 준 박현정 씨에게도 감사드린다. 촉박한 일정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솜씨로 편집과 교정을 맡아준 마찬옥 편집위원께도 감사드린다.
끝으로 이번 집필 과정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격려를 해 준 구민교의 부모님, 동생 희연과 홍교, 그리고 아내 은희와 삼남매 윤지, 수지, 준우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최병선의 두 외손자인 정재헌과 재하, 그리고 구민교의 삼남매가 장성한 뒤 읽더라도 여전히 유익한 책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지나친 욕심일 수 있겠지만 이 책이 전달하려고 한 핵심 메시지는 살아남을 것으로 믿는다. 그리고 20년 뒤에는 어떤 구원투수가 다시 나와 바통을 이어갈지 궁금해진다.
2019년 1월
관악 캠퍼스에서
최병선․구민교
목차
제1장 자유무역 대 보호무역, 3,000년간의 대치
1. 스미스 대 리스트 1
2. 국제무역의 정치경제학적 이해 7
3. 국제무역의 법경제학적/제도주의적 이해 13
4. 이 책의 체계와 구성 19
제1부 국제무역의 국내정치경제
제2장 중상주의와 보호무역이론
1. 중상주의 사상의 기원 27
1.1 고대와 중세의 무역관념 27
1.2 고전적 중상주의 31
1.3 중상주의와 경제민족주의 34
2. 주요 보호무역이론의 검토와 평가 37
2.1 유치산업보호론 37
2.2 전략적 무역이론 40
2.3 상호주의에 입각한 보호무역론과 공정무역에 입각한 관리무역론 48
3. 기타 보호무역이론에 대한 평가 54
3.1 최적관세론 54
3.2 국가안보 및 사회적 안전 차원의 보호무역론 55
4. 신중상주의의 부활 움직임과 그 전망 61
제3장 자유무역사상과 비교우위론
1. 자유무역사상 63
1.1 자유무역의 논거 63
1.2 자유무역이론의 전제조건과 현실적 한계 70
2. 정태적 비교우위론 76
2.1 리카도의 비교우위론 76
2.2 헥셔-올린 모형 81
3. 동태적 비교우위론 85
3.1 규모경제이론 85
3.2 국가경쟁우위론 86
4. 국제무역과 소득분배 88
4.1 스톨퍼-사뮤엘슨 정리 89
4.2 특정요소 모형 92
5. 비교우위론에 대한 오해와 진실 94
제4장 주요 보호무역조치와 행정적 보호제도
1. 관세, 쿼터, 수출자율규제 97
2. 수출보조금 104
3. 행정적 보호제도 107
3.1 긴급수입제한조치(세이프가드) 108
3.2 불공정무역에 대한 보호조치: AD와 CVD 112
3.3 무역조정지원 제도 116
4. 보호무역정책의 결정요인에 관한 이론 119
4.1 공공선택이론적 접근 119
4.2 사회보험으로서의 보호정책 121
4.3 거시경제 상황과 무역정책 선호 122
4.4 선거제도와 무역정책 패턴 123
4.5 관료제의 무역정책 성향 124
5. 자유무역 옹호집단에 관한 연구 125
제2부 국제무역의 국제정치경제
제5장 국제 자유무역체제의 등장
1. 19세기 자유무역질서의 형성과정 129
1.1 자유무역체제의 태동 129
1.2 영국의 「곡물법」 폐지 131
1.3 「1860년 코브던-슈발리에 조약」과 자유무역 네트워크의 확산 135
1.4 자유무역질서에 대한 도전 138
2. 전간기(戰間期)의 국제무역체제 141
2.1 경제민족주의의 부활 141
2.2 제1차 세계대전과 국제무역질서의 와해 143
2.3 대공황과 경쟁적 보호주의 145
3. 전후 다자간 국제무역질서의 형성 148
3.1 미국의 적극적 역할과 다자주의 이상 148
3.2 「대서양 헌장」 151
3.3 국제무역기구(ITO) 설립 구상과 GATT의 탄생 153
제6장 GATT/WTO 체제의 지배원리
1. 국제무역레짐으로서의 GATT/WTO 163
1.1 자유주의적 지향성 163
1.2 배태적 자유주의 사상의 등장 165
1.3 무차별원칙과 상호주의의 조화 167
2. 최혜국대우원칙 169
2.1 조건부 대 무조건부 MFN 원칙 169
2.2 무임승차 문제와 MFN 적용 예외 규정 174
3. 상호주의 183
3.1 일차적 상호주의와 전면적 상호주의 183
3.2 상호주의와 무조건부 MFN 원칙의 관계 185
3.3 공격적 상호주의 187
제7장 다자간 무역협상의 의의와 주요 무역 라운드
1. 다자간 무역협상의 구조와 체계 195
1.1 다자간 무역협상의 의의 195
1.2 다자간 무역협상의 단계 196
1.3 협상이슈 연계의 의의와 유형 197
1.4 부문별 협상의 한계 202
2. 관세협상 203
2.1 관세협상과 상호주의 203
2.2 주요공급자 협상과 막바지 협상 204
2.3 GATT 관세인하 방식과 그에 대한 평가 206
3. 비관세협상 209
4. GATT의 주요 협상 라운드 개관 211
4.1 제네바, 안시, 토키 라운드 211
4.2 제네바라운드(1955-1956) 212
4.3 딜론라운드(1960-1962) 213
4.4 케네디라운드(1964-1967) 214
4.5 도쿄라운드(1973-1979) 217
4.6 우루과이라운드(1986-1994) 223
4.7 도하개발라운드(2001-2015) 227
제3부 WTO의 체계와 주요 협정
제8장 국제기구로서의 WTO
1. GATT에서 WTO로 233
1.1 GATT의 국제기구로의 변모 과정 233
1.2 WTO 창설 배경과 과정 235
2. WTO의 구조와 의사결정 방식 236
2.1 WTO의 의사결정 구조 236
2.2 WTO의 의사결정 방식 242
2.3 협정의 수정안 채택방식과 신규가입 협상 244
3. WTO와 분쟁해결 251
3.1 GATT의 분쟁해결절차 251
3.2 WTO 분쟁해결절차의 의의 254
3.3 WTO 분쟁해결절차의 평가 264
4. WTO의 투명성 원칙과 무역정책 검토제도 270
제9장 상품무역 부수협정(1): 신규 추가 협정
1. 상품무역 협정(GATT)의 의의 278
2. 농업 협정 283
2.1 농업 협정의 의의 283
2.2 농업 협상의 전개과정 284
2.3 WTO 농업 협정의 주요 내용 285
2.4 DDA에서의 농업 협상 291
3. 원산지규정 협정 296
3.1 원산지규정 협정의 의의 296
3.2 WTO 원산지규정 협정의 주요 내용 298
4. 무역 관련 투자조치(TRIMS) 협정 300
4.1 무역 관련 투자조치의 의의 300
4.2 TRIMS 협정의 주요 내용 301
5. 세이프가드 협정 306
5.1 세이프가드 협정의 의의 306
5.2 세이프가드 협정의 주요 내용 308
6. 무역원활화 협정 313
6.1 무역원활화 협정의 의의 313
6.2 무역원활화 협정의 주요 내용 314
제10장 상품무역 부수협정(2): 도쿄라운드 규약의 다자화
1. 위생 및 식물위생 조치(SPS) 협정 318
1.1 SPS 협정의 의의 318
1.2 SPS 협정의 주요 내용 320
2. 무역기술장벽(TBT) 협정 325
2.1 TBT 협정의 의의 325
2.2 TBT 협정의 주요 내용 327
3. 반덤핑(AD) 협정 334
3.1 AD 협정의 의의 334
3.2 AD 협정의 주요 내용 337
4. 보조금 및 상계조치(SCM) 협정 344
4.1 SCM 협정의 의의 344
4.2 SCM 협정의 주요 내용 345
5. 관세평가 협정 351
5.1 관세평가 협정의 의의 351
5.2 관세평가 협정의 주요 내용 353
6. 수입허가 협정 356
6.1 수입허가 협정의 의의 356
6.2 수입허가 협정의 주요 내용 357
제11장 서비스무역 협정
1. 서비스무역의 의의 359
2. 우루과이라운드 이전의 서비스무역 논의와 협상 361
3. GATS의 기본원리 365
3.1 GATS의 구조 365
3.2 일반적 의무 및 규율에 관한 주요 조항 369
3.3 구체적 약속 관련 주요 조항 373
3.4 점진적 자유화와 부문별 후속협상 377
3.5 분쟁해결절차 380
4. GATS의 정치경제 381
4.1 부문별 협상의 한계 382
4.2 서비스무역 방식에 대한 선호 384
4.3 회원국 정부의 자유화 및 개혁전략에 대한 함의 385
제12장 무역관련 지식재산권 협정
1. 무역관련 지식재산권 보호의 의의 391
2. TRIPS 협정의 구조와 특징 394
2.1 협정문의 구조 394
2.2 이행기간의 설정 398
2.3 협정의 집행과 분쟁해결절차 400
3. 도하라운드 협상의제 401
3.1 포도주와 증류주에 대한 지리적 표시의 다자통보 및 국제등록 401
3.2 지리적 표시 특별보호 확대 402
3.3 강제실시와 공중보건 403
3.4 TRIPS와 생물다양성 협약 간의 관계 405
4. TRIPS 협정의 한계와 전망 407
제13장 무역 연계 이슈
1. 무역 연계 이슈의 개관 412
2. 무역과 환경 413
2.1 무역확대와 환경오염의 관계 413
2.2 WTO 규범과 환경규제 416
2.3 논의의 진전 상황 422
3. 무역과 노동기준 429
3.1 문제의 성격과 쟁점 429
3.2 논의의 진전 상황 433
4. 무역과 인권 436
4.1 문제의 성격과 쟁점 436
4.2 무역과 인권의 충돌과 조화 436
4.3 논의의 진전 상황 438
5. 무역과 경쟁정책 440
5.1 문제의 성격과 쟁점 440
5.2 WTO 협정과 경쟁정책 442
5.3 논의의 진전 상황 445
6. 무역과 개발 451
6.1 문제의 성격과 쟁점 451
6.2 특허의약품에 대한 접근 452
6.3 개도국 우대조항 454
6.4 무역을 위한 원조 458
제4부 한국 무역정책 결정구조와 체계
제14장 한국 무역ㆍ통상 정책의 재조명
1. 한국 무역ㆍ통상 정책의 개관 463
2. 발전주의-국가주의-자유주의의 연계 466
2.1 발전주의와 중상주의의 연계 466
2.2 발전국가론과 자유주의의 연계 468
3. 신통상정책의 전개과정 471
3.1 발전주의적 중상주의에서 발전주의적 자유주의로 471
3.2 동시다발적 FTA 전략과 배태성 473
3.3 신통상정책에 대한 평가 477
4. 무역ㆍ통상 거버넌스 체제의 과제와 전망 480
4.1 통상전담부처 설치 논란 480
4.2 산업부처 주도형에 대한 평가 484
4.3 향후 전망과 과제 487
참고문헌 4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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