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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행본

(정신의 공화국) 하이델베르크

저자
김덕영
발행사항
서울 : 신인문사, 2010
형태사항
430p. : 삽화, 지도, 초상 ; 22 cm
소장정보
위치등록번호청구기호 / 출력상태반납예정일
이용 가능 (1)
자료실E206088대출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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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2060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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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실
책 소개
800년 역사를 지닌, 그러나 인구 14만의 작은 도시 하이델베르크 이야기

* 한국인 학자가 독일의 작은 도시 하이델베르크를 이야기하는 이유는?

자본주의 시대에는 모든 도시가 산업과 경제 기능만을 추구해야 할까? 그런 시대일수록 산업 이외의 다양한 기능을 가진 도시가 더 요구되는 것은 아닐까? 정신적 가치를 도외시한 채 오직 물질적 가치만 중시하는 천박한 유물주의 사회가 되는 것을 피하고 싶다면 말이다. 하이델베르크 역에 내리면 ‘대학도시 하이델베르크’라는 현판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여기에 네카어 강변의 작은 도시 하이델베르크의 수백 년 역사와 의미가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것은 중세에도 르네상스 시대에도 바로크 시대에도 산업사회에도 그리고 후기 산업사회 혹은 포스트모던 사회라고 불리는 오늘날에도 변치 않는 하이델베르크의 정체성이었다.
저자 김덕영은 이러한 하이델베르크의 역사와 풍광을 살펴보며 우리 사회를 성찰하고 있다. 그것은 모든 것을 숫자로 환산해 서열을 매기고 최고(最高), 최고(最古), 최대(最大), 최신(最新), 최다(最多), 최장(最長), 최초(最初)만을 강조하며 1등주의에 목을 매는 한국 사회에 대한 메시지이다. 저자에 따르면 이러한 한국의 풍토는 지금 이 순간의 물질적 이해관계에 따라 역사와 전통, 자연을 쉽게 파괴하고 삶의 정신적, 질적 가치를 무시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현대’에 의해 ‘과거’가 끊임없이 파괴되는 사회가 한국 사회라는 것이다.

* 대부분 시골이나 아주 작은 도시에 사는 독일인들
인구 8천 만이 넘는 독일에서 인구 100만 이상의 거대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550만이다. 베를린 인구도 우리나라의 부산과 비슷한 340만 명에 불과하다. 범위를 넓혀 10만 이상의 대도시에 사는 사람들이라고 해봐야 약 2천500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약 30퍼센트에 불과하다.
반면 대한민국에서는 서울만 인구가 1천만을 훌쩍 뛰어넘는다. 인도의 봄베이와 델리, 터키의 이스탄불, 파키스탄의 카라치에 이어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인구가 많다. 그리고 수도권에만 전체 인구의 약 반, 역시 100만 이상의 도시에 전체 인구의 약 반이 살고 있다. 정치, 경제적으로는 물론 문화적으로도 모든 기능이 서울에 집중된 대한민국 기준으로 보면 독일인 다수는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소외된 인구 10만 이하의 도시나 시골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정말 그런 것일까?

* ‘나눔의 미학’을 실천하는 독일의 도시들
독일의 바이마르는 인구 6만5천으로, 우리나라의 읍에 가까운 도시이다. 그러나 바이마르는 세계적인 문호인 괴테와 실러는 물론 작곡가 리스트, 철학자 니체 등이 활약했던 곳으로 18세기부터 19세기까지 독일 정신문화의 중심이자 고전문학의 메카였다. 한 역사가는 “독일 민족의 자의식은 바이마르에서 태어났다”고 평하기까지 했다. 1919년에는 역사적인 독일공화국의 국민회의가 열려 바이마르 헌법이 제정되기도 했다. 독일 역사는 물론 세계사의 무대였던 셈이다.
바이마르만 그런 것이 아니다. 괴팅겐은 근대 수학의 메카이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과 더불어서 20세기 물리학의 양대 산맥을 형성하는 양자역학이 탄생한 곳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곳으로 인구는 약 12만이다. 예나는 수많은 시인과 사상가와 자연과학자를 배출한 유서 깊은 대학이 있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광학기구 제조업체가 있는, 갓 인구 10만을 넘긴 도시이다. 인구 2만6천의 아주 작은 도시 라인벡에는 ‘로볼트’라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출판사가 있는데 독일에서는 출판사들마저 국토 곳곳에 흩어져 있다. 국토 곳곳에 유서 깊은 문화재와 극장과 도서관과 대학이 있는 독일은 한곳에 정치, 경제, 문화의 기능을 집중시키지 않는 ‘나눔의 미학’을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 그야말로 국토 곳곳이 역사와 문화의 중심지이자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다.
하이델베르크 역시 그렇다. 인구는 14만에 불과한 곳이지만 독일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이 있어 수많은 시인과 예술가와 사상가와 학자를 배출하며 독일의 정신사에 기여했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하이델베르크 인쇄기 회사와 막스 플랑크 연구소 등이 위치하고 있다.

* 전통과 첨단, 자연과 도시, 정신과 예술이 어울린 도시 하이델베르크
8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하이델베르크에는 중세시대의 건축물에서 최첨단 빌딩까지 공존하고 있다. 구시가지는 수백 년이 된 집들이 온존한 채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고, 폐허가 된 고성은 수많은 시인과 예술가를 불러들이며 중기 낭만주의의 무대가 되었다. 고풍스러운 돌다리는 이 도시의 백미이다. 600년이 된 대학과 300년이 된 학사주점이 있는 곳도 하이델베르크이다. 그런가 하면 하이델베르크는 독일의 자유주의 정신을 이끌며 사상과 정치 발전에 공헌했고, 최근 2008년에는 이곳의 국립 암 연구 센터 소속 하랄트 추어 하우젠 교수가 노벨 생리ㆍ의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전통과 첨단이 조화를 이룬 도시인 셈이다. 동시에 하이델베르크는 도시 전체가 아름다운 자연에 둘러싸인 전원도시이기도 하다. 도시 안에 자연이 있고, 자연 안에 도시가 있는 것이다. 도시와 자연이 공존하며 역사와 전통을 보듬고 가는 하이델베르크는 세계촌락으로 불리며 학문과 낭만을 찾아 많은 이들이 몰려드는 곳이 되었다. 그리고 하이델베르크 신화와 하이델베르크 정신을 탄생시킨 영원한 청춘의 도시이자 정신의 공화국이 되었다. 전통과 현대, 자연과 도시가 공존하는 ‘나눔의 미학’을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 하이델베르크 대학과 “항상 열려 있는, 살아 있는 정신에게”
대학도시 하이델베르크의 정체성이 시작되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은 6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독일 최초의 대학이다. 1385년에 로마 교황 우르바누스 6세의 대학 창립 허가 칙서가 반포되고, 1386년에 강의을 시작했다. 정식 명칭은 루프레히트 카를 대학으로 대학의 창립과 부흥에 공헌했던 인물의 이름에서 따온 명칭이다. 이처럼 독일 대학에는 모두 고유의 정식 명칭들이 있다. 그런데 저자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이 독일 최고(最古)의 대학이지만 그렇다고 최고(最高)의 대학은 아니라고 잘라 말한다. 아니 독일의 대학에는 서열이 없다고 말한다. 1등 대학, 2등 대학과 같은 서열 매기기로는 독일 대학들의 진면목과 대학 사회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각 지역 제후들의 후원으로 자율적으로 발전해온 독일의 대학들은 각기 독특한 학풍과 전통을 자랑하고, 학생들은 대학을 옮기며 강의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관광명소이기도 한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학생감옥이다. 중세에서 자치권을 지니고 있던 도시를 배경으로 존재했던 대학은 도시 안에서도 독자적인 사법권을 지닌 또 다른 자치조직이었다. 그래서 질서를 위반한 학생은 학교 자체의 사법권으로 학생감옥에 구금할 수 있었다. 이처럼 중앙의 통제를 받지 않았던 독일의 대학들은 독특한 전통과 개성을 자랑하며 서로 경쟁하였고, 이름 없던 대학도 얼마든지 유럽의 정신과 문화를 이끄는 중심지로 부상할 수 있었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은 중세에서 후기산업사회(혹은 포스트모던 사회)에 이르는 동안 여러 위기와 부흥기를 맞이했지만 19세기에서 20세기 초에 걸친 기간 동안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당시 유럽을 풍미한 낭만주의의 중요한 무대가 되었고, 헤겔을 비롯해 인문·자연과학 분야의 막강한 인물들이 교수로 있었다. 그리고 19세기 후반부터는 세계촌락으로 불리며 수많은 유학생들이 하이델베르크로 몰려들었는데 막스 베버를 비롯한 일군의 지식인들이 이러한 분위기를 이끌었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에는 민주주의 정신의 아성이 되기도 했다. “항상 열려 있는, 살아 있는 정신에게”는 이러한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정신을 상징하는 슬로건이기도 하다.

* 하이델베르크 고성과 문화재 보존의 진정한 의미
15세기 초에서 17세기에 걸친 200년의 시간 동안에 세워진 하이델베르크 고성은 빼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했고 17세기 초에 세워진 고성 안의 팔츠 정원은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정원의 하나로 꼽힐 정도였다. 그러나 성은 팔츠 상속 전쟁 와중에 파괴되고 말았다. 이처럼 폐허가 된 고성은 또 다른 아름다움을 불러일으켜 숱한 낭만주의자들을 하이델베르크로 불러들이는 값진 문화적 명소가 되었다.
이후 고성의 복원 문제를 둘러싸고 유명한 하이델베르크 고성 논쟁이 일어났는데 이 논쟁의 대미를 장식한 인물은 근대적인 문화재 관리의 이념을 수립하고 실천한 게오르크 데히오였다. 그가 제시한 문화재 보호 원칙은 “유지하고 오직 유지할 따름이다”였다. 즉,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과거의 문화적 유산을 가능한 한 자신들의 해석이나 논리로 덧칠하지 않은 온전한 상태로 보존해 후손들에게 물려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폐허 상태로 보존되게 된 고성은 인간에 의해 탄생한 뒤 자연과 역사와 예술이 결합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며 다시 자연 속으로 돌아가는 미학적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그리고 숱한 문인과 예술가와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명소가 되었다.

* 카를 테오도어 다리, 성령 교회
하이델베르크를 관통하는 네카어강에 1788년에 세워진 고풍스러운 다리(카를 테오도어 다리)는 하이델베르크의 경관의 백미로 꼽힌다. 사람들로 하여금 네카어강과 주변의 도시를 둘러보며 천천히 걷게 만드는 다리이다. 이 아름다운 다리는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와중에 연합군의 진주를 저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독일군에 의해 일부가 파괴되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난 후 하이델베르크 시민들이 내린 결정은 연합군을 놀라게 했다. 시민들이 교통이나 경제적 측면으로 봤을 때 매우 중요한 다른 다리들보다 먼저 이 다리를 재건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 다리는 시민들의 사랑을 받았던 하이델베르크의 상징이었던 셈이다.
이 책은 그 외에도 시 곳곳을 누비며 독일의 영혼이자 유럽의 정신을 담은 정신의 공화국 하이델베르크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전통과 미래, 자연과 도시, 정신과 물질, 다른 도시들과의 공존이라는 ‘나눔의 미학’이 실현되고 있는 곳이다.
목차
1장: 한국은 서울을 세우고, 독일은 하이델베르크를 세우다 - 낯선 눈으로 우리 문화 다시 보기 - 2장: 독일의 도시들, 나눔의 미학을 실현하다 - 모든 도시가 주인공이다 - 3장: 하이델베르크의 신화와 정신 - 자연과 역사와 문화의 향연 - 4장: 궁정과 대학이 함께 만든 도시 - 중세에서 포스트모던 사회까지 이어진 정체성 - 5장: 항상 열려 있는, 살아 있는 정신에게 - 600년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역사 - 6장: 한국인의 눈에 비친 대학 풍경 - 나의 독일 유학 시절 이야기 - 7장: 폐허가 되어 더욱 빛나는 고성 - 문화재 보존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 8장: 자연과 자연, 사람과 사람을 잇는 카를 테오도어 다리 - 사람들을 천천히 걷게 만드는 다리 이야기 - 9장: 성령 교회를 통해 본 유럽의 속살 - 광장 그리고 삶과 죽음의 미학 - 10장: 정신의 공화국이 탄생하다 - 네카어 강변에 꽃을 피운 다양한 정신들 -